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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황금의 어스듐 20화

아르고-황금의 어스듐 20화
[데일리게임]

티노는 손을 설레설레 저으며 답하고 숙소로 향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점심 무렵이 되었을 때 티노는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갔다. 좋은 약을 쓴 것은 아니더라도 어스듐이 섞인 약이라 그럭저럭 상처가 아물긴 했지만 일부러 풀지 않았다. 아직 자유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공방 사람들의 동정과 양해가 필요했다.

“티노!”

라디가 달려왔다. 이미 티노가 다쳤다는 걸 알면서 새삼 낯빛이 안 좋다. 그렇게 많이 다친 것도 아닌데 유난스럽다는 생각도 살짝 들긴 했다. 이 정도는 부상 측에도 끼어 주지 않는 할아버지와 친구 사이에서 컸기 때문일까?

“들었어! 플로레스라한테 당한 거라며?”

“……뭐?”

“벌써 소문이 자자해! 어젯밤 성벽에서 플로레스라가 난동을 부렸다고! 거기에 일반인이 휩쓸려서 크게 다쳤다고! 그게 티노 맞지?”

“……별로 크게 다치지는…….”

친구를 편들 수는 없지만 라디의 말에 호응할 수도 없었던 티노는 어색하게 말을 흐렸다. 벌써 식판의 반을 비워 가고 있던 웨이가 빈정거렸다.

“잘난 척하더니 플로레스라 한 놈도 못 당해서야 어떻게 친위대에 들어갈 수 있겠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티노가 다친 건 다 웨이 선배 때문이잖아요!”

“뭐가 나 때문이냐? 내가 플로레스라한테 저놈 머리 좀 후려갈겨 달라고 사주라도 했다는 거야?”

생사람 잡지 말라며 웨이가 버럭 소리 질렀다. 원래는 이쯤에서 물러날 라디가 어째서인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듯이 쏘아붙였다.

“지금껏 웨이 선배가 밤에 배달해 본 적 있어요? 밤은 위험하니까 안 된다며 아침에 갖다 준다고 거절해 왔잖아요! 그랬으면서 괜히 티노를 괴롭히려고 떠넘기고!”

“허! 얘가 말하는 본새 좀 보게?!”

웨이는 반박할 거리가 없자 라디의 태도를 걸고넘어지려 했다. 하지만 잔뜩 흥분한 상태인 라디는 가만히 듣고 있지 않았다.

“티노는 웨이 선배의 심술 때문에 죽을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겠어요?”

“허허…….”

웨이는 라디나 티노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다른 선배들의 시선마저 점점 안 좋아지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라디는 그런 웨이를 보며 흥, 하며 거칠게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티노의 이마에 감긴 붕대를 걱정스레 보았다.

“정말 다행이야. 죽을 수도 있었다고.”

“걱정해 줘서 고마워.”

죽을 뻔했다는 건 정말이다. 하지만 라디나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티노에게 악의를 품고 잔인하게 죽이려 한 것은 같은 노블리언이었다.

“하필 그런 일에 말려들어서!”

라디는 안심하는가 싶더니 곧 분노한 얼굴이 되었다. 물론 분노의 대상은 티노가 아니었다.

“플로레스라와 내통하려 한 자는 그 플로레스라의 손에 죽었다더라? 그러게 뭘 믿고 플로레스라와 만난 거야?! 백번 죽어 싸지! 쓰레기 같은 작자!”

주먹을 꾹 쥐고 입술을 깨물다가 곧 티노의 손을 붙잡고 안으로 이끌었다.

“이렇게 무사하니까 다 잊어버려. 내통한 자는 죽었고, 잠입하려 한 플로레스라는 잡혔으니 다 끝난 거잖아.”

“그래. 난 별로 신경 안 쓰니까 라디도 너무 신경 쓰지 마.”

티노는 어쩔 수 없이 웃음을 만들어 내야만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오늘치 원석 수거를 하러 나가 보겠다는 티노의 말에 라디는 이번에도 대뜸 소리를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하루 종일 다소 흥분상태였다. 조금만 일이 생겨도 파르르 떨어서 말을 거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정도다. 그 증거로 항상 이맘때면 세척실 구석에서 승급시험 준비를 하던 웨이도 그녀를 피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오늘 꼭 원석 수거를 할 필요도 없고, 만약 한다 해도 나랑 웨이 선배가 할 거야. 티노는 그냥 푹 쉬라니까?”

“답답해서 그래. 가만히 있으니까 더 아픈 것 같고……. 움직이면 좀 나을 것 같아.”

티노는 조곤조곤 설득했다. 안 그러면 침대에 묶어서라도 내보내지 않을 기세였던 것이다. 라디가 자신을 걱정해서 그런다는 걸 아니 고맙긴 하지만 방임에 길들여져서인지 솔직히 조금 성가시기도 했다.

“하지만……!”

“명색이 친위대원 지망생인데 이 정도 일에 하루 종일 침대 신세를 지고 싶지는 않아.”

티노는 자신의 심정을 이해해 달라며 달래듯이 말했다. 그 말에 라디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좋아. 하지만 조금이라도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으면 바로 들어오기다?”

“알았어.”

“머리 부상은 특히나 조심해야 한다고. 겉보기엔 아무렇지 않아도 큰일 나는 수가 있으니까. 내 말 가볍게 듣지 마.”

“뼛속까지 새겨듣겠습니다!”

라디가 넘어오자 이번엔 정색하고 진지한 체 넉살을 부렸다. 그러자 라디는 겨우 풋, 하고 웃었다.

정확히 무슨 생각이 있어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명료한 목적 하에 대략적인 가닥은 잡히는데 구체적인 것은 영 정리가 되질 않았다. 방 안에 틀어박혀서 줄곧 고민했지만 속만 답답해졌다. 이러는 동안에도 아르카가 무슨 고초를 겪고 있을지 모른다. 일반 시민에게까지 소문이 퍼졌는데 살려 둘 리가 없다. 게다가 아르카는 이쪽과 내통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더불어 내통자를 죽였다는 누명도 썼다.

……뭐, 따지고 들면 죽인 건 맞지만 그자는 내통자는커녕 티노를 죽이려 한 나쁜 놈이다. 하지만 아르카가 그런 이야기를 할 리가 없다. 그 말을 하는 순간 티노까지 위험해지니까. 티노 역시 그와 같은 입장이었다면 결코 입을 열지 않았을 것이다.

살려 내야만 한다. 아르카가 그래 주었던 것처럼. 티노에게 지금 있는 것은 기계공학에 대한 지식과 실력, 그리고 친위대원인 테이슨과의 친분 정도다. 그것도 어쩌다 보니 남보다는 가까워진 어중간한 친분일 뿐. 그래도 다행인 건 테이슨이 성격이 좋다는 것과 그와 지금 함께 진행하고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친위대의 감옥이 어디 있는지는 테이슨을 통하지 않아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르카가 수감되어 있는 곳이 어딘지를 정확히 알려면 테이슨이 필요하다. 테이슨에게 티노는 어설픈 재능 하나 믿고 온 촌뜨기 소년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경계심을 늦출 수 있다. 나중에 티노에게 의심이 돌아오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알아내야 할 텐데…….

위치를 알아낸다고 끝도 아니다. 어떻게 구출할 수 있을까? 내통자가 있을 거란 의심을 하고 있으니 감시도 철저할 것이다. 티노 혼자의 힘으론 무리다. 아르카는 강하니까 버킷을 비롯한 무기를 구해다 주면 강력한 전력이 될 것이다. 이곳에서 버킷을 구할 수 있을 리 없으니 그가 가지고 온 것을 찾아내야 할 텐데. 압수당했을 거란 건 쉽게 짐작이 가지만 그게 어디에 보관되어 있을지는 알 수가 없다.

이래저래 답답하기만 해서 티노는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그 녀석, 혼자 왔을까……?”

왜 이곳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플로레스라에겐 너무나 위험한 곳을 단신으로 올 리가…… 있구나. 그 녀석이라면. 그러고 보면 아르카처럼 노블리언으로 위장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아 할 플로레스라가 또 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하아…….”

그런데도 티노에겐 알아서 하겠다고 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그 녀석?

“가만히 있을 수 있을 리 없잖아, 바보 자식.”

그나마 오늘은 남 말하기 좋아하는 직원이 있는 어스듐 교환소는 가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다. 이 와중에 그 사람까지 상대하면 머리가 터져 버릴지도 모른다.

“아, 젠장! 대체 이번 달만 몇 번째야?!”

“어제는 성벽까지 끊겼다는데! 불안해서 살 수가 있나!”

정신은 딴 데 던져 놓은 채 몸에 익은 대로 뱅커를 몰던 티노는 갑자기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괴성에 움찔했다.

“음?”

뱅커를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고서야 조금 늦게 상황을 이해했다.

“아……, 또 끊겼나?”

티노는 무감각하게 중얼거렸다. 지금 그에겐 씨드가 끊기는 것 따윈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씨드가 너무 자주 끊기고 있다는 것은 그 역시 알고 있었다. 게다가 수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그조차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씨드가 끊기는 간격이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비상용 어스듐 라인이 있는 공방에 쭉 박혀 있었다면 몰랐을 테지만 매일 원석을 수거한답시고 뻔질나게 거리를 돌아다니기에 알 수 있었다.

“자기들한테는 해당사항이 없으니까 다들 하나같이 입 꼭 다물고는 예산이 부족하다는 헛소리나 해 대지!”

“빌어먹을!”

씨드가 끊길 때마다 듣는 나라님 욕을 한 귀로 흘리며 뱅커를 다시 몰려던 티노는 불현듯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이 점점 길어져, 자기 일에 바쁘던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볼 정도가 되었다.

“이봐, 꼬마! 길 한복판에 뱅커를 세워 놓고 뭐 하는 거야?”

한 남자가 티노의 어깨를 툭 치며 퉁명하게 말했다.

“아…….”

티노는 그를 돌아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다시 뱅커를 몰고 가던 길을 마저 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씨드가 돌아왔고, 미친 듯이 짜증을 내던 사람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다시 집중했다. 그렇게 이번 소동도 이제는 수도의 일상이 되어 버린 양 유야무야 묻혔다.

원래는 어스듐 교환소 세 곳을 도는 날이었지만 한 곳은 내일로 미뤘다. 대신 이리저리 길을 비집고 다니며 무언가를 찾았다. 어디에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구조적으로 어디쯤에 위치해야 할지는 알기 때문에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티노는 주위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뱅커의 시동을 껐다. 지지대가 내려오면서 땅에 착지한 뱅커에서 내려, 돌아다닐 때 주워 뒀던 종이와 천 따위를 펼쳐서 그 위에 덮었다. 볼썽사납게 뱅커에 수레를 달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티노의 행적이 어느 식으로든 드러날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다.

다음으로 골목 구석구석에서 낡은 상자나 쓰레기통, 버려진 목재 등을 주워서 대로에서 이쪽이 정확히 보이지 않도록, 그러면서도 너무 인위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교묘하게 교차해 가며 쌓았다.

그러고 나서야 티노는 골목 바닥에 놓여 있는 맨홀 뚜껑 앞에 섰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맨홀 뚜껑의 가장자리 작은 홈에 드라이버를 끼워 넣고 누르자 손바닥만 한 크기의 철판이 위로 올라왔다. 철판 아래에는 열쇠 구멍이 있었다. 티노는 작은 핀 따위를 꺼내어 열쇠 구멍에 끼워 넣고 이리저리 각도를 맞췄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듯 손놀림이 꽤나 능숙했다.

곧 철컥 하고 맨홀 뚜껑이 위로 조금 들렸다. 틈새에 손을 넣어 뚜껑을 열자 어른 두 명이 간신히 오갈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구멍이 나타났다. 그 벽면엔 튼튼한 쇠사다리가 박혀 있었다.

티노는 고글을 쓴 뒤 망설임 없이 쇠사다리에 발을 딛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완전히 땅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맨홀 뚜껑을 닫았다. 그 전에 잠금장치에 천을 끼워 넣어 자동으로 잠기는 것을 막는 걸 잊지 않았다.

한참을 내려가자 드디어 바닥이 나왔다. 조명이 없어 어두웠지만 도중에 야간경 기능을 켰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맨홀 아래는 좁은 동굴 같은 터널이 양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건조한 공기가 감도는 이곳은 바로 도시 구석구석에 퍼져 있는 어스듐 라인이 설치되어 있는 곳이다. 갈림길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못해 미로같이 꼬여 있는데다 종종 길이 막혀 있고, 안에서는 맨홀 뚜껑을 열 수 없기 때문에 제대로 알고 들어오지 않으면 위험한 곳이다. 하지만 당장은 멀리 돌아다닐 생각이 없었다.

티노는 자신이 내려온 길에 그만이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남겼다. 그리고 동굴 천장과 벽면에 복잡하게 설치되어 있는 어스듐 라인을 꼼꼼히 살펴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나아갔다.

얼마나 걸어 들어갔을까? 티노의 입가에 드디어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다양한 크기의 어스듐 라인에 교묘히 섞여 있는 회로. 그것은 아주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어스듐 라인과 유사했지만 가짜였다. 오히려 어스듐 라인에 끼어들어서 씨드를 훔쳐 가는 도둑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근래 빈번하게 일어나는 씨드 단절의 범인이기도 했다.

전문가가 며칠을 두고 어스듐 라인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펴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는 것을 티노가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유난히 뛰어난 눈썰미와 지식 따위를 가져서……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티노와 아르카만 아는 일인데, 실은 티노에게도 이런 짓을 한 전적이 있었다. 램의 공방에서는 어스듐 한 조각, 코어 한 방울까지도 철저하게 기록한다. 때문에 램 몰래 움직일 필요가 있었던 티노는 어스듐 라인에 살짝 수작을 부려 마을의 대형 어스듐의 씨드를 조금 끌어다 썼다.

하지만 저 회로를 설치한 범인처럼 정전이 될 정도로 과하게 사용하지 않았다. 딱 한 번 실수로 그런 일이 발생한 적은 있었지만 다행히 이른 새벽이었고 금방 원래대로 돌아갔기에 들통 나지 않았다. 그 이후로는 한층 신중하게 작업하여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수도에 와서 처음으로 씨드가 끊긴 현장을 봤을 때부터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정말 전쟁에 의해 어스듐 라인이 망가진 것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수도 어딘가에 티노와 비슷한 자가 있다는 쪽에 확신이 갔다. 하지만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적도 없고 비슷한 짓을 한 일종의 동류로서 티노는 그것을 나서서 고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도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동류가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가 궁금했다. 그는 상당히 대범한 작자라 생각된다. 전쟁 이후의 혼란을 빌미 삼아서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를 실컷 하고 있는 거니까. 그 발생 빈도가 잦아진다는 것은 실험이 성공 직전이거나 실패 직전이란 뜻이겠지.

‘덕분에 나도 써먹을 수 있겠어.’

소도둑의 그늘에 숨어 있으면 바늘 도둑 따윈 가려져 보이지 않는 법이다. 티노는 어스듐 라인에 침범한 회로의 연결 구조와 흐름을 눈여겨본 뒤 돌아섰다. 당장은 이것을 확인한 것으로 족했다.

신승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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