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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체육 100년100인100장면] 40. 이건희의 추억 ⓷ 스포츠 비화

야구장과 레슬링 경기장 중 어느 곳을 많이 다녔나.

1982년 이건희 회장은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의 구단주였다. 그러나 야구장엔 많이 다닌 편이 아니었다. 그가 처음 야구장에 간 것은 구단주로서 삼성의 홈 개막전이 열린 대구구장이었다. 그리고 많이 알려진 두 번째 야구장 ‘구경’은 1984년 삼성-롯데의 잠실야구장 한국시리즈 7차전 이었다.

[대한민국체육 100년100인100장면] 40. 이건희의 추억 ⓷ 스포츠 비화


삼성은 중반을 넘긴 6회까지 4-1로 앞서고 있었고 여러 가지 분위기상 7차전을 이겨 한국시리즈 챔피언이 될 것 같았다. 처음 경기장에 가지 않았던 이건희회장은 결국 잠실야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가 좌석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7회 장효조가 평범한 플라이볼을 놓쳐 2점을 내준 후 8회 롯데 유두열에게 통한의 역전 3점 홈런을 맞고 시리즈를 내주고 말았다.

우승을 대비해 삼정호텔에 준비해 놓았던 얼음사자상은 하염없이 녹아내렸고 하필 자신이 나타난 그때부터 삼성이 점수를 내주며 진 것을 생각하며 이후 이건희회장은 야구장을 거의 찾지 않았다.

하지만 레슬링 경기장은 큰 대회가 있을 때마다 찾았다. 회장을 맡은 후 처음 치른 1984년 LA 올림픽 때 삼성 소속 김원기뿐 아니라 유인탁의 금메달 현장을 지켰던 이건희 회장은 88서울올림픽 때는 레슬링경기가 열린 성남의 상무체육관을 자주 찾았다.

이회장은 본부석에 혼자 앉아 경기를 지켜봤는데 한두 시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가 움직일 때는 화장실 갈 때와 그곳에서 담배를 피울 때 뿐이었다. 당시엔 실내체육관이라도 화장실등 에선 자유롭게 흡연이 가능했다.

레슬링을 했던 전력이 있어서 레슬링경기자체에도 흥미를 지닌 편이었다. 서울올림픽 자유형84kg 금메달리스트인 한명우는 경기 도중 부상으로 이마에 붕대를 감고 경기에 나섰다. 상처가 심하진 않았으나 심하게 보였다. 이마에 맨 붕대가 계속 피로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명우는 틈만 나면 붕대를 다시 매곤 했다. 붕대에 피가 흥건하거나 붕대가 풀리거나 해서 다시 묶는 것은 하지만 한명우의 ‘작전’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서른세살. 힘이 딸렸다. 붕대를 고쳐 매는 척 하면서 체력을 회복, 경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그 전략을 이건희 회장은 알고 있었다. 이회장은 금메달을 딴 직후 여전히 이마에 붕대를 감고 있는 한명우를 보며 “일부러 그러는 줄 알고 있었다. 괜찮은 전략”이었다고 했다.

1992년 올림픽이 열린 바로셀로나나 1996년의 애틀랜타에도 이 회장은 빠지지 않았다. 바르셀로나 당시 금메달리스트인 안한봉, 박장순 등 대표 선수들에게 비디오 기기와 TV를 선물했다. '비디오 분석을 통해 상대 선수의 기술과 특성을 분석 해보라'는 말과 함께.

한명우의 금메달에 일정 부분 기여했는지.

호적엔 1956년생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한 살 더 많은 한명우는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후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곤 선배의 권유에 따라 캐나다 이민을 추진했다. 하지만 그 소식을 전해들은 이회장이 장창선전무를 통해 한명우를 잡도록 했다.

“아까운 자산을 왜 밖으로 내보냅니까. 얼마나 공들여 키웠는데 말이죠. 잡으세요. 선수가 안되면 트레이너직으로라도 대표팀에 넣으세요.”

장전무는 이민 준비를 거의 끝낸 한명우를 그렇게 묶었고 한명우는 대표선수들의 트레이너로 태릉에 들어갔다. 선서로서가 아니라 트레이너로 레슬링을 대하면서 한명우는 경기운영에 대한 노하우를 확실하게 터득했다.

선수시절에는 알 수 없었던 많은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슬그머니 선수로 복귀, 대표선발전을 통해 올림픽에 출전했고 아시아 최고령, 최중량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대한민국 레슬링 국가대표팀에서 트레이너는 한명우가 처음이었고 84kg급 우승은 아시아에서 처음이었다.

평창동계올림픽에 동원한 이건희의 IOC위원 인맥.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는 이건희에겐 지상명령 같은 것이었다. ‘IOC위원으로서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콕 찝어 특별사면까지 한 터이고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면 후일의 여러 가지 일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으니 이래저래 심혈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체육 100년100인100장면] 40. 이건희의 추억 ⓷ 스포츠 비화


이회장은 평창 유치전 이전엔 IOC 활동을 많이 하지 않았다. 김운용위원이 알아서 잘 했으므로 굳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혼자가 되는 바람에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어떤 승리에도 결코 우연은 없다’는 걸 누누이 말했던 그는 삼성그룹의 전 세계 모든 안테나를 세우게 한 후 우선 그의 IOC동기들을 하나하나 접촉했다.

동기라고 해서 특별히 뭘 같이 하거나 한 것은 아니고 그저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총회때 같이 피선된 인연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남달랐다. 이회장의 IOC 위원 동기는 파키스탄의 샤이드 알리, 스웨덴의 린더버그, 우루과이의 훌리오, 짐바브웨의 토마스 싯홀, 미국의 킬리안, 북한의 장웅과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중국위원등 총 12명.

이회장은 승마를 통해 왕족출신의 스페인 위원과 교우를 나누는 등 삼성 직원들이 올린 IOC위원 동향보고를 분석한 후 일대 일로 만나 아군으로 돌렸다. 이회장은 의외로 많은 부문에 전문가 못지않은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IOC지도부는 오히려 쉬웠다. 1996년 IOC 위원에 피선된 후인 1997년 IOC와 톱 파트너 십 계약을 체결, 계속 이어왔기 때문이었다.

이건희 회장의 그 인맥이 없었다면 더반 총회 1차 투표에서 과반의 득표를 하며 유치전에 성공할 수 없었다. 이 회장의 공이 누구보다 컸지만 이 회장 역시 평창 덕분에 IOC 인맥이 넓어졌고 그 영향력 또한 강해졌다. 그 덕분에 그의 사후 IOC는 조기를 달고 애도했으며 바흐위원장이 조화를 보냈다.

홍라희여사는 왜 선수들과 함께 있었나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레슬링 경기장. 미모의 중년 여성이 선수들과 함께 응원을 하고 있었다. 레슬링 팀엔 여성이 단 한명도 없기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건희회장의 부인 홍라희여사였다.

이회장과 함께 레슬링 구경에 나섰으나 이 회장이 하도 근엄하게 앉아있어서 응원 같은 걸 할 수 없었다. 좀이 쓰신 그는 슬며시 자리를 빠져나와 선수들 사이에 끼어 든 것이었다.

이회장은 자리를 잡고 앉으면 말도 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 스타일. 홍여사로선 한국 선수들을 응원하면서 경기를 보면 좋겠는데 이회장이 아무 말 않고, 아무 움직임 없이 경기장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어서 그의 말대로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선수들 응원석이 바로 홍여사의 피난처였던 셈인데 선수들과 함께 신나게 응원, ‘스트레스가 풀리면’ 다시 이 회장이 앉아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서울올림픽 때 포상금은 얼마나 되었을까.

금메달을 딴 다음 날 한명우는 최영길김독과 함께 한남동 이건희회장 집에 초대되었다. 한명우가 한남동에 간 것은 오전 9시 30분. 조금 앉아있는데 전화가 왔다. 대통령 노태우였다.

그는 먼저 이회장과 통화한 후 최영길 감독, 한명우 선수와 차례로 전화 통화를 했다. 노대통령은 한명우에게 다친 이마는 괜찮은지 묻고 고생했고 축하한다고 했다. 그날 10시쯤 통화하기로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었다.

한명우는 그곳에서 점심을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다. 오후 3시반 쯤 나왔다. 나올 때 두 가지를 받았다. 하나는 스위스제 론진 시계였고 또 하나는 봉투였다.

시계는 당시 삼성과 비즈니스 계약을 맺고 있던 론진이 이회장의 부탁을 받고 한명우와 김영남 등 두 명의 레슬링금메달리스트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뒷면에 서울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한명우라고 새긴 특별한 시계였다. 당시 국내 시가는 세금 포함 1천만원대였다.

봉투에는 수표 한 장이 들어있었다. 1억원짜리 였다. 최영길 감독은 3천만원이었다. 이 회장은 그 봉투를 선수단 모두에게 돌렸다. 봉투안의 돈은 금메달은 1억원, 은메달은 5천만원, 동메달은 3천만원, 그리고 감독, 코치, 협회 임원들은 3천만원에서 5천만원까지였다.

서울올림픽 레슬링 메달은 금메달 2개, 은메달 2개, 동메달 5개였고 자유형, 그레코로만형 감독, 코치가 2명이었다. 포상금 대상은 임원을 포함 총 15명 선이었다. 줄잡아 7억 여원이 올림픽 포상금으로 나갔는데 레슬링의 경우 이회장은 정부에서 주는 만큼의 경기력향상지원금을 또 주기 때문에 포상금 액수만도 상당액에 이르렀다.

[이신재 마니아리포트 기자/20manc@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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