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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손자병법]35 이승엽과 괄목상대(刮目相對)

-눈을 비비고 다시 본다. 갑자기 몰라 볼 정도로 발전함. 사별삼일즉경괄목상대(士別三日卽更刮目相對). 선비는 헤어진 지 사흘이 지나면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할 정도로 달라져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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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해야 하나. 고등학교 때 타석에서 결정타를 날리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투수가 우선이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부상 때문에 공을 던질 수 없었다.

걱정과 미련을 버리고 방망이를 잡았다. 열심히 하다보면 안될 것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삼성 우용득 감독이 사기를 북돋워주었다.

“고등학교 때 너 치는 거 봤는데 재주가 있더라. 투수보다 타자 쪽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충분히 가능성 있어.”

그래도 불안했다. 겉으로 봐선 모르지만 발이 느렸다. 다른 선수였다면 안타가 될 것을 땅볼 아웃으로 처리된 적도 있었다. 왼손잡이라 어느 정도 만회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은 연습으로 고쳐질 것이 아니었다.

입단 후 첫 동계훈련. 땀내 나는 훈련으로 3개월여를 지냈다. 거액의 신인을 키워야 하는 우용득 감독의 배려(?)덕분에 주전 타자 자리를 잡았다. 함께 입단한 재능 있는 타자 황성관을 제치고 거의 전 경기에 출장했다.

1995년 시즌 고졸 신인 이승엽. 1억3천여만 원의 역대 고졸 최고 계약금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고2때 경북고를 청룡기 우승으로 이끌며 최우수투수상을 수상한 것에 대한 대가였다. 타자가 아니라 투수 몫이었다. 그러나 그는 프로에선 타자로 뛰어 121경기에서 2할8푼5리의 타율을 기록했다.

실패작은 아니었지만 홈런은 13개에 불과했다. 힘을 앞세운 강타자가 아니라 정확하게 방망이를 갖다 맞추는 교타자 스타일이니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그로인해 22홈런을 친 같은 팀의 중고신인 이동수에게 신인왕자리도 빼앗겼다.

이듬 해 백인천 감독이 팀을 맡았다. 백 감독 역시 이승엽의 타격에 큰 기대를 걸었다. 나름의 타법을 전수했다. 1996년 홈런은 9개로 전 해보다 줄었다. 그러나 이승엽은 타격을 해 가면서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홈런이 힘만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방망이가 매끄럽게 돌아가고 허리가 잘 들어가며 팔을 끝까지 뻗으면 별 힘을 쓰지 않아도 홈런이 된다는 것을 몸으로 터득했다.

홈런 비결을 부지불식간에 깨달은 이승엽은 틈나는 대로 ‘홈런 스윙’을 연습했다. 그리고 프로 3년차인 1997년, 다분히 홈런을 염두에 두고 타석에 섰다. 결과는 126경기에 32홈런.

됐다 싶었던 이승엽은 1998년 시즌 홈런왕을 목표로 잡았다. 그가 마음먹은 대로 방망이는 연일 홈런을 쏟아냈다. 홈런왕뿐만 아니라 장종훈 외에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40홈런 고지도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방망이에 힘이 들어가면서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했다. 겨울 훈련 부족으로 다리에 힘이 빠진 것도 막판 실패의 원인이었다. 요령 말고도 더 필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배운 이승엽은 1999년 시즌 다시 한 번 도전했다.

신체조건으로 보아 ‘한 번 그러다 말지 않을까’했으나 그때부터 이승엽은 KBO리그의 홈런 역사를 써나가기 시작했다. 그 겨울 혹독한 웨이트 트레이닝과 근력운동으로 중무장한 그는 막판까지 힘을 잃지 않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스윙, 힘을 주어야 할 때 힘을 줄 줄 아는 확실한 임팩트. 자신의 최다 홈런 기록을 가볍게 뛰어넘은 후 사상 최초로 50홈런 고지도 돌파했다. 종반 홈런 스트레스가 가중되어 일본 프로야구 왕정치의 55홈런 기록을 깨지 못했지만 23세의 젊은 이승엽이 쏘아올린 54개의 홈런포는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엽은 4년 후인 2003년 기어이 56홈런으로 새 역사를 썼다.

[이신재 마니아리포트 기자/news@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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