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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겜문학개론]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 그 세 번의 역겨움

2020년 새해를 맞아 데일리게임에서 새로운 형식의 칼럼을 준비했습니다. 인문학도의 눈으로 게임과 게임 세상 이야기를 해보는 코너입니다. 오랜 기간 게임을 즐겨온 '찐 게이머' 필자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와 연결된 게임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 독자 여러분께 전달할 예정입니다. < 편집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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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 포스터. 소니인터렉티브엔터테인먼트 제공
[글=신진섭 게임칼럼니스트] 장안(長安)의 화제, 식상한 표현이지만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이하 라오어2)'를 가리키긴 적절한 표현이지 싶습니다. 미국에서 나온 게임 하나가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평론가와 이용자의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립니다. 플레이스테이션4 최고의 게임이란 칭송과 이용자를 배반한 게임이라는 비판이 상존합니다.

오늘은 '라오어2'가 비판받는 이유에 대해 분석해 보려 합니다. 이용자들이 가장 큰 불쾌감을 느꼈다고 입을 모으는 세 가지 장면을 중심으로 따져보겠습니다(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시는 분은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주세요).



◆첫 번째 역겨움, 조엘의 허무한 죽음



전 편의 주인공이었던 조엘 밀러는 플레이타임 2시간30분경 잔인하게 살해당합니다. 이용자들을 가장 분노케 했던 일명 '골프 장면'입니다. 미대륙 절반을 헤쳐 나갔던 전편의 조엘이라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허무하게 죽죠.

조엘이 죽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앞선 트레일러를 통해서 조엘이 이번 편에 사망할 거란 건 어느 정도 예상되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용자들이 큰 역겨움(불쾌감)을 느꼈을까요. 그렇게 느끼도록 게임이 설계됐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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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


회상해봅시다. 조엘을 살해하도록 에비를 그 장소까지 데려온 사람은 누구였나요. 다름 아닌 이용자 자신입니다. 엘리를 조종하다가 영문도 모른 채 신규 캐릭터 에비를 플레이하게 됩니다. 좀비떼를 피해가며 에비 캐릭터에 정이 들랑 말랑 하던 시점, 절체절명의 순간에 조엘이 영웅처럼 등장해 이용자(에비)를 구출합니다.

조엘을 만난 반가움도 잠시, 생명의 은인에게 에비는 샷건으로 화답합니다. 바로 직전까지 내가 플레이하던 캐릭터가 조엘을 쏘다니! 믿던 도끼에 발등 찍혔습니다. 조이스틱을 떨굴 만큼 황당한 일이 발생했지만 이유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용자가 에비를 나쁜 놈(빌런)으로 인식하도록 철저히 조직된 서사입니다. 육성으로 욕설이 자동적으로 튀어나가는 이유죠.

엘리는 어떤가요. 연인과 사랑을 나누다 정찰을 소홀히 해 조엘 사망의 원인을 제공합니다. 부랴부랴 뛰어나가 보지만 금세 제압당해 땅에 꼬꾸라지고 그저 무력하게 조엘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합니다.

너티독은 벌써 두 번의 죄책감을 이용자에게 심었습니다. 이용자는 에비를 플레이해 조엘을 만나게 한 죄를 지었습니다. 또 사랑 놀음을 하다 조엘을 제때 구하지 못했다는 죄도 더해집니다. 이용자가 플레이어블(조작가능) 캐릭터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을 이용한 거죠.

'라오어2'는 전 편 팬을 '배신'해 감정을 고조시킵니다. 애착을 느끼는 대상을 으깨고 도덕적으로 타락시킵니다. 이용자가 느끼게 되는 감정은 단순한 분노 이상입니다. 조엘의 죽음의 책임이 '나'와 우리가 가장 사랑했던 소녀에게도 있다는 불쾌함, 설명되지 않는 죽음에 대한 당혹스러움이 곁들여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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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도 모른 채 당한 피해, 그 복수란 테마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처럼 강렬하다. 게임 초반까지만 그렇다.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이용자는 조엘이 사망한 이유를 밝히기 위해, 에비의 '뚝배기'를 깨기 위해, 그리고 조엘에게 속죄하기 위해 조이스틱을 다시 잡게 됩니다. 복수를 위한 강렬한 동기가 갖춰졌습니다. 한 동안 마치 그렇게 이야기가 흘러갈 것 같은 상쾌함도 느껴지죠. 마치 영화 '킬빌'의 주인공처럼 원수를 때려잡을 수 있을 것으로 이용자는 믿게 됩니다.

◆두 번째 역겨움, 에비로 엘리를 쏘라고?



너티독은 다시 한 번 이용자를 배신합니다. 에비를 플레이하라고, 에비의 과거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왜 에비가 조엘을 죽였는지 궁금하지 않느냐고 속삭입니다. 선택지는 없습니다. 엔딩을 보고 싶으면 좋건 싫건 에비가 돼 봐야만 합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그 에비를 말이죠.

이런, '라오어2'가 시퀄(속편)인 줄 알았더니 동시에 프리퀄(전편)이었네요. 에비 역시 이 참혹한 아포칼립스 세계의 희생자였습니다. 전편에서 엘리를 해부하려다 조엘에게 죽은 파이어플라이의 의사가 바로 에비의 아버지였군요. 그러니까 에비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엘리의 유사 아버지(조엘)를 죽인 것이었구먼요. 에비를 구하려고 1편에서 의사를 죽인 당신 역시 죄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렇게 선과 악의 경계는 허물어졌습니다. 그래서 스코어는 1대1 동점입니다 '잔넨'.

만약 이렇게 이용자가 느끼길 바랐다면 큰 착각이었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1편의 서사와 2편의 서사는 맹렬하게 충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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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 가족애가 곁들여진 선악이 희미한 복수극을 보고 싶다면 '마더'가 제격이다. 아마 너티독은 이런걸 그려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전편이 이용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던 건 가족애(愛) 때문이었습니다. 인류에게 가장 강렬하고 보편적인 감정이죠. 제 아무리 무심한 사람이라도 자식을 희생하는 부모 이야기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릅니다. 식상하단 비판에도 주말연속극은 가족 간의 불화로 시작해 화해로 끝이 납니다.

조엘은 역경에 맞서, 인류가 지켜야 할 도덕률까지 져버리면서까지 엘리를 지켜냈습니다. 아니 플레이어가 엘리를 지켜냈습니다. 좌충우돌 딸 때문에 마음 졸이면서 미 대륙 절반을 횡단했습니다.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엘리의 순수성을 지키려했던 1편의 엔딩은 이 세상 아버지가 짊어진 삶의 무게를 은유하는 듯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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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월드컵 당시 동점골을 넣는 안정환. 너티독은 극적인 동점골이라고 외치고 싶었던 걸까.


그런데 2편에서 너희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를 죽였으니 '쌤쌤'이라고 설득할 수 있을까요. 에비의 아버지가 '대의'를 위해서 엘리를 희생시키려했단 이유로 면죄부를 받게 될까요. 논리적으론 가능한 얘기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는 건 슈퍼컴퓨터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가족애는 논리를 한참 앞서 있죠. 이미 플레이어는 조엘과 엘리의 가족애에 몰입해 있는데 에비의 가족사가 눈에 들어올 리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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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어1'에서 엘리를 실험하려는 장면.


또 엘리와 에비가 겪은 비극은 형식적으로는 유사하지만 내용면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딸을 실험체로 사용하겠다는데 '어쩔 수 없구먼. 수고하시오'라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조엘의 살인은 어느 정도 당위성을 갖췄습니다. 여기에 비한다면 에비 아버지의 행위는 당위성이 떨어지죠. 사람에 따라 가치판단이 달라질 수 있는 문제입니다만, 1편의 플레이어들이 의사에게 총을 쏘고도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됐던 이유죠.

그래서 이용자들은 에비에게 또 한 번 분노하게 됩니다. 조엘의 살인은 선택불가능(서사적으로나 시스템적으로도)했고, 에비는 선택할 기회가 남아 있었습니다. 조엘은 에비에게 원수인 동시에 생명의 은인입니다. 조엘의 살인과 에비의 살인은 등치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당신이 죽인 파이어플라이 일원들의 복수'라고 했으면 더 설득력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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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타임(사진 출처=만화 '슬램덩크').


너티독은 총을 쥐어줍니다. 에비가 돼서 엘리를 쏘라고 부추깁니다. 메스꺼움과 궁금증이 동시에 엄습합니다. '내가 이러려고 6만 원을 썼냐'는 현자타임이 찾아오죠. 게임의 서사가 에비와 엘리를 도덕적으로 대등한 상태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편 플레이어들에게 여전히 정의는 엘리와 조엘 편입니다.

◆세 번째 역겨움, 복수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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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어2' 엔딩.


이야기는 점점 더 기괴해집니다. 에비는 적대조직의 아이들 야라, 레브를 만나 이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조직을 이탈합니다. 에비의 죄는 무거워집니다. 동료의 남자와 간통하고 동료를 살해합니다.

'라오어2'는 에비에 전편의 조엘을 투영하기 시작합니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 에비는 도덕률을 무시하기 시작합니다. 에비의 전투방식도 전편의 조엘을 떠올리게 하죠. 딸을 잃고 몰락할 뻔 했던 조엘이 엘리를 통해 인간성을 회복하듯, 복수의 화신이었던 에비는 아이들을 지키며 삶의 새 목적을 찾아간다는 듯이 서사가 진행됩니다.



에비가 가부장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방해할만한 캐릭터들은 순식간에, 또 우연하게도 삽시간에 죽임을 당해 극에서 퇴장합니다. 아이들을 고아로 만들기 위해, 또 에비가 조직에서 떨어져나온 외톨이로 만들기 위해서 극이 흘러가고 있다는 작위성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플레이어들은 에비를 조엘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 때문이 아닙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용서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죽인 살인범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사회는 앞으로도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겁니다. 친족살해범에 대한 대승적 용서란 책상머리에서, 또 공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비현실적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다른 아이를 구했다고 해서 속죄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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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 속죄의 폐해를 다룬 영화 '밀양'. 피해자 외에 그 누가 용서할 자격이 있을까.


엘리는 결국 에비를 죽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엘리에게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조엘의 환영은 조엘과 에비를 등치시키려는 장치로 읽힙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 지을 수 없는, 선과 악이 서로 섞인 이념적 회색지대가 바로 '라오어2'가 담고 싶었던 메시지라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엘리가 조엘의 유품이자 복수를 다짐했던 도구인 기타를 남겨두고 집을 떠나면서 '라오어2'는 막을 내립니다. 비참하고 쓸쓸한 엔딩입니다. '라오어2'는 베드엔딩만 존재하는 게임입니다.

◆정말로 이걸로 충분한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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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어2' 출시 전 닐 드럭만은 자신의 트위터에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을 인용했다. 혐오하는 자 우리의 음반을 사지 말라는 게 골자다.


왜 너티독의, 닐 드럭만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없을까요. 복수하지 말고 용서해라, 선과 악은 쉽사리 구분되지 않는다. 좋은 얘기입니다. 하지만 기대하던 얘기는 아니죠. 과연 팬심을 배반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메시지인가요?

'라오어2'의 서사는 변증법(dialectic)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질문을 해서 상대방에게 어떤 자기모순이 있는지를 발견해내게 만드는 방식이죠.

에비의 이야기를 보고도 너희가 착한 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니, 에비의 성장을 보고도 느끼는 게 없니, 결국 세상은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게 아닐까? 플레이타임 30여시간 동안 메시지가 귓가에 울리고 또 울립니다. 너무 노골적이어서 불편할 정도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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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반합.


조엘과 엘리가 기존가치 정(正)이라면 에비는 가치에 의문을 던지는 반(反)을 담당합니다. 복수를 포기한, 손가락이 잘린 엘리는 합(合)이죠. 제작진은 '라오어2'의 세계가 모순을 발견하고 이를 극복해 진보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 세계를 목도하라고 플레이어에게 말하죠. 마치 1편의 세계가 불쾌하고 힘들지만 넘어서야만 했던 장애물인 것처럼 말입니다.

◆너티독의 '에케호모', 닐 드럭만 빌라도인가 유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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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케호모(이 사람을 보라)', 연도 미상, 패널에 유채, 75*61, 프랑크푸르트 시립 미술관.


빌라도가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 이로다(Ecce Homo)'하매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요한복음 18:36~19:6)

유대인이 예수를 붙잡아 당시 유대 총독인 빌라도에게 데려갔습니다. 빌라도는 예수와 대화를 하곤 그에게 죄가 없다는 걸 알게 되죠. 빌라도는 당시 관습에 따라 예수를 풀어주려고 했지만 대중은 예수가 아니라 강도인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말합니다. 메시아를 부정하고 기득권을 사수하려던 바라바를 말이죠.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면서도 '너희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을 거듭 말하죠.

'라오어2'의 엔딩을 보며 이 에케호모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너티독은 에비의 죄만은 아니라고, 그를 이 복수의 연환에서 풀어줘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용자들은 에비가 아니라 엘리를 살려야 한다고 말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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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어2'가 출시 불과 몇 시간 만에 1편의 리뷰 수를 넘어섰다는 닐 드럭만의 트윗. 이후 유저 스코어를 캡처하는 걸 까먹었다는 비아냥이 이어졌다.


너티독의 부사장이자 '라오어2'의 디렉터인 닐 드럭만은 자신의 처지를 빌라도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깨닫지 못한 자들의 목소리에 진리가 가려지는 듯이 말이죠.

시각차는 분명합니다. 대다수 이용자들은 닐 드럭만을 빌라도가 아니라 가룟 유다(Iudas)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팬들과 전편을 배신한 디렉터란 얘기입니다.

'라오어2'의 서사 방식은 폭력적입니다. 변증법이 내포하고 있는 계몽(enlightment)의 위험성이기도 하죠.

변증법은 사회가 일직선으로 진보한다고 믿습니다. 미개의 세계에서 계몽의 세계로 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제 3의 가치'라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추구해야 할 선(善)의 달성을 위해 타자에게 야만이라는 꼬리표를 붙입니다. 서구는 '아는 것이 힘'이라는 베이컨의 가치를 걸고 세계를 계몽시켜왔습니다. 아프리카, 아시아에 대한 착취는 무지와 야만을 계몽시킨다는 미명하에 진행됐습니다.

'라오어2'의 서사 구조에서 비슷한 인상을 받습니다. 이용자에게 어떤 선택지도 주어지지 않고 정해진 결말을 위해 등을 떠밀립니다. 원하지도 않고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임에도 저항할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해서 하는 게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라오어2' 주인공은 플레이어인 '나'가 아니라 게임사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부터 플레이어는 주체가 아닌 객체로 전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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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베를 떠도는 안티고네와 오이디푸스. 유진 어네스트 힐마쉐, 1854.


'라오어2'가 전적으로 엉망이라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사실 서사만 떼어놓고 본다면 그리 문제될 것도 없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를 저지르고 신체를 훼손한 채 방황한다는 건 그리스 희곡 '오이디푸스 왕'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선악의 이분법적 도식의 붕괴는 새롭다고 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흔합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설국열차'를 비롯한 대부분 영화와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가 비슷한 메시지를 담았죠. 빌런을 주인공으로 한 최근의 히어로뮤비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지적되는 PC적 요소도 괜찮습니다. 시대를 앞서가는 작가주의 정신이라고 보면 그만입니다.

문제는 이 게임이 '라오어'의 후속편이라는 겁니다! 다른 게임도 아니고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게임 중 하나의 후속편입니다. 분명 제작사엔 수년간 속편을 기대했던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팬들이 이 시리즈를 왜 좋아하는지 알면서 이를 배반한 건 창작자의 직무유기입니다. '로건'식의 스토리를 기대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면 적어도 비슷하게 만들려는 시도는 해봐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정보를 종합해보면 개발사는 팬들의 기대를 의도적으로 배반했습니다. '킬빌'처럼 가장하다가 갑자기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선회하죠. 창작물은 출판된 순간부터 단순한 저자의 소유물이 아닌, 팬들의 것이기도 하다는 걸 망각한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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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건'인줄 알았다가 '킬빌'인줄 알았는데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였다.


만약 '라오어0' 식의 스핀오프 개념의 게임이었다면 팬들이 이렇게 분노했을까요. 선택에 따라 엔딩이 달라지는 멀티엔딩이었다면 어땠을까요. 복수를 성공시켜 죄의 연환에서 남을지, 용서할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라도 플레이어에게 줬다면요. 하지만 현실은 어땠나요. 이야기 혼자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종착지를 향해 달려 나갔습니다. 상행선인 줄 알고 티켓을 샀는데 알고 보니 하행선, 그것도 부산행 열차였던 겁니다. 좀비가 아닌 교훈과 계몽으로 가득 찬 스릴러 서스펜스 호러 무비죠.

작가주의적 창작물을 원했다면, 게임 이상의 예술적 가치를 구현해내고 싶었다면 별개의 시리즈에서 시도했어야 합니다. '라오어'가 아니라 다른 게임이나 소설에 자신의 이념을 담는다면 누가 왜 태클을 걸겠습니까.

◆비평가와 대중의 괴리, 셜록 홈즈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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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뭣이 중하다고 생각했을까(사진=영화 '곡성').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그렇다면 왜 수많은 전문가들과 비평가들은 '라오어2'를 극찬했는가. 정말 이들이 게임사와 결탁했기 때문에 허위로 리뷰를 작성했을까요. 아마 그건 아닐 겁니다.

비평가와 대중의 괴리는 이렇게 발생합니다. 비평가는 직업적으로 콘텐츠를 다루죠. 하루에도 여러개의 창작물을 소비합니다. 수백개 수천개를 보다 어느 순간 특이점에 다다르죠. 웬만한 콘텐츠에서 참신함을 발견할 수 없게 됩니다. 대중이 즐거워할만한 황금률, 즉 '클리셰'에 반감을 갖게 되죠. '재작년에 했던 어떤 게임과 올 초에 나온 어떤 게임을 버무리면 이 게임쯤 되겠군. 이것도 거기서 거기'라는 식의 생각이 납니다.

그러다 보니 참신함과 창의성에 더 높은 점수를 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지평을 넓힌' 콘텐츠를 고평가하기 쉽습니다. 이 기준에서 보면 '라오어2'는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합니다. 증오하는 대상으로 플레이한다는 '역지사지', 게임적 요소를 극대화한 시스템, 그간 게임에서 볼 수 없었던 참신한 결말 등. 무엇보다 클리셰를 찾아보기 힘든 서사에 감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게임의 영역을 벗어난', '게임이 예술이 될 가능성' 등 비평가들의 '라오어2'를 향한 찬사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대중과 호흡하지 못하는 비평이 얼마만큼의 무게감을 지닐 수 있을까요. 누군가는 '라오어2'에서 게임 이상의 것을 봤다고 합니다. 너티독도 게임 이상의 것을 담았다고 자신있게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용자들이 원하는 게임 본연의 가치, 재미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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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 변증법'.
독일의 사상가 아도르노는 저서 '계몽의 변증법'에서 변증법의 제 1국면이 객체에 대한 주체의 우위라면 그 안티테제로서의 제 2국면은 주체에 대한 객체의 우위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가르침을 주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의 우위가 전복될 수 있다는 겁니다. 더 쉽게 말하자면 소비자가 안 사고, 안 보면 땡이란 거죠.

추리소설의 고전 '셜록 홈즈'의 아버지 아서 코난 도일은 사실 '셜록 홈즈'를 싫어했습니다. 요즘 말로 라이트노벨 식의 저급한 소설이라고 생각했죠. 그저 돈푼 벌어 보려고 썼던 '셜록 홈즈' 시리즈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자 작가는 당황했습니다. 좀 더 진중하고 가치 있는 작품을 쓰고 싶어 했죠. 그는 '셜록 홈즈' 시리즈를 끝내고 싶어 결국 주인공을 작중 사망시키기에 이릅니다. 독자들은 홈즈를 살려달라고 아우성쳤습니다. 코난 도일은 항의에 못 이겨 7년 후 홈즈를 '버스커빌 가의 개'로 부활시키죠. 정작 코난 도일이 쓰고 싶어 했던 소설들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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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어2'의 중고가격은 수직 낙하 중이다.


물론 '라오어2'의 가치판단은 현재진행형입니다. 몇 년 후 재평가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현재 분위기를 봐선 그보단 조엘이 스핀오프로 부활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네요. 비평가들의 높은 메타크리틱 점수가 너티독의 매출로 전환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작품성이란 건 작가의 고집이 아니라 대중의 선택을 통해 결정된다고 역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정리=이원희 기자(cleanrap@dailyga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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