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e-sports

[겜문학개론] 심시티, 하는 게임에서 만드는 게임으로

2020년 새해를 맞아 데일리게임에서 새로운 형식의 칼럼을 준비했습니다. 인문학도의 눈으로 게임과 게임 세상 이야기를 해보는 코너입니다. 오랜 기간 게임을 즐겨온 '찐 게이머' 필자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와 연결된 게임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 독자 여러분께 전달할 예정입니다. < 편집자주 >

center
'심시티2000'.
[글=신진섭 게임칼럼니스트]

"끝이 없는 게임이 어디 있어!" 개발자 윌 라이트는 연이은 거절에 의기소침해졌습니다. 그의 신작 '마이크로 폴리스'는 그야말로 괴상했죠. 출생률, 인구, 부동산, 공해, 범죄 등 요소를 넣어 도시계획 시뮬레이션하는 게임을 만들겠다는 이 괴짜 개발자에게 선뜻 투자를 결정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스토리도, 엔딩도 없는 게임이 어디 있냐는 핀잔만 돌아왔습니다.

윌 라이트는 어느 날 개발자 파티에서 귀인 제프 브라운을 만납니다. 제프 브라운은 '마이크로 폴리스'의 창조성에 감탄했고 두 남자는 개발 끝에 1989년 게임을 출시, 3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게 됩니다. 이 게임이 바로 '샌드박스(모래상자)' 장르의 조상으로 불리는 '심시티'입니다.

윌 라이트의 유년 시절이 '심시티' 개발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가 다닌 몬테소리 학교는 주변의 사물을 이용해 원리를 스스로 깨치는 장난감 교육으로 유명합니다. 부수고 조립 하는 경험이 개발 철학의 싹을 틔운 거죠.

center
'퐁'.
지금이야 이용자 자유도가 높을수록 칭송받지만 '심시티' 이전의 게임에는 스토리와 엔딩이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물론 단순히 공을 주고받는 '퐁' 같은 초기작들이 있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산업이 자리잡은 이후로는 캐릭터가 무언가를 해서 끝을 본다는 게 게임의 정의나 다름없었습니다.

center
'팩맨'.
1980년 '팩맨'의 등장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죠. 주인공 외에도 개성 있는 적 캐릭터 4명이 등장했고, 단순한 전투가 아닌 '먹고 피한다'는 규칙을 설명하기 위해 스토리 요소, 바로 '컷신(Cut Scene)'이 출현했습니다. 1981년 '동키콩', 1982년의 '너구리(원제 폰포코)'와 '뱀게임(원제 니블러)', 1986년 '원더보이' 등 당대를 풍미했던 게임들은 모두 '팩맨'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탄생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심시티'의 성공은 게임의 정의 자체를 바꿔 놓았습니다. 엔딩과 스토리가 없어도 게임이라는 걸 그가 증명해낸 셈이죠. '심시티'의 기록적인 판매고는 이후 시뮬레이션 장르 게임 개발을 촉발합니다. '문명', '타이쿤' 시리즈, '블랙앤화이트' 등 전설적인 게임들이 줄줄이 출현합니다.

◆장난감이 된 게임, 하는 게임에서 만드는 게임으로

center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비디오게임 '마인크래프트'. 별명은 '디지털 레고'다. '마인크래프트' 출시 이후로 레고의 장난감 판매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조립품 대신 조각난 장난감을 던져주는 윌 라이트의 개발철학은 개발자와 이용자의 관계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짜인 서사(이야기)를 순서대로 따라가는 닫힌 세계가 아니라, 이용자가 세계를 창조하는 열린 세계로 전환됩니다.

지난 2011년 발매된 '마인크래프트'는 윌 라이트의 철학이 극대화된 게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정해진 목표도 엔딩도 없지만 현재까지 약 1억8000만 장이 팔려 역대 가장 많이 팔린 비디오게임의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재료를 파고 건물을 짓고 전투를 하고, 모든 건 이용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서사에 개발자의 입김은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용자의 상상력이 곧 이야기가 되죠. 무규칙이 규칙인 셈입니다.

각종 모드(Modification)의 출현도 같은 맥락에서 읽힙니다. 이용자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게임을 재창조하며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습니다.

center
AOS 계보. 스타 유즈맵 'AOS'에서 수많은 게임들이 파생됐다(출처=AOS 나무위키 캡처).
'하프라이프'의 일개 모드에 불과했던 '카운터 스트라이크'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FPS(총싸움) 게임이 됐습니다. 국내 PC방 점유율 50%에 육박하는 '리그오브레전드'는 '스타크래프트'의 유즈맵에서 비롯됐습니다. '도타'도 '히어로즈오브더스톰'도 모두 스타 유즈맵 '영원한 투쟁(Aeon of Strife, AOS)'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개발사가 정해놓은 규칙을 파괴해 새로운 재미를 불어넣는 '스카이림'이나 '엘더스크롤'의 모드도 유명하죠.

◆포스트모더니즘의 바람, 저자도 개발자도 죽었다.

center
제 2차 세계대전이 남긴 전쟁의 상흔은 포스트모더니즘을 탄생시킨다.
샌드박스 게임의 출현과 발전, 수용자와 소비자의 전복은 시대적 흐름과 맞물립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조의 징후들과 샌드박스 게임의 특성은 서로 닮아 있습니다.

1960년대 시작된 포스트모더니즘은 제 2차 세계대전에 강한 영향을 받아 전후(戰後) 사조라고도 불립니다. 너무나 비인간적인 참극을 목격하며 당대의 지식인들은 그간의 사고를 지배했던 합리성과 이성, 객관주의에 대한 의문을 품습니다.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모조리 붕괴하고 말았습니다. 전후의 세계를 표현하기엔 그들의 예술은 너무나 빈약하고 초라했죠.

center
롤랑 바르트.
특히 소설에서 큰 변화가 발생합니다. 창작자의 권한은 박탈당했습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롤랑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을 선언합니다. 저자가 자신이 쓴 글(텍스트)의 의미를 결정할 수 있었던 시대는 끝났다는 겁니다. 지성인으로서 작가들이 자부심을 갖고 써 온 글들이 오독(誤讀)돼 참극을 막지 못했다는 반성에서 출현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똑같은 글이라도 읽는 사람, 시대,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콘텐츠와 의미가 1대1이 아닌 1대 무한대가 되는 세상이 시작된 거죠. 작가는 글을 작성할 뿐 의미 부여는 전적으로 독자에게 달려있습니다.

샌드박스 장르는 지극히 포스트모더니즘적입니다. '롤러코스터 타이쿤'은 놀이동산을 경영하는 게임이지만 상당수 이용자는 방문객을 가두고 굶겨 고문하며 즐거움을 느낍니다. 집에 화장실을 만들지 않고 무슨 일이 일어나나 관찰하거나 불을 지르고 뛰쳐나오는 심(심즈 주민)들을 관찰하라고 적은 설명서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개발자도 그런 의도로 게임을 만들지는 않았죠.

게임은 더 이상 개발자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각종 퀘스트와 강제 이벤트로 점철된 게임은 획일적이고 지루하다는 평을 듣기 십상입니다. 개발자가 서사를 강요하는 게임이 이용자들은 염증을 느낍니다. NPC, 오브젝트(사물), 그리고 다른 이용자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풍부한 서사를 직접 만들어낸 게임이 호평 받는 세상입니다.

◆게임은 진화한다, 이상하게

center
영화 '어벤저스'에서 병약했던 청년 스티브 로저스는 실험을 통해 슈퍼 솔저로 거듭난다. 그가 남들보다 뛰어났던 건 순수한 마음과 끈기였다(사진 제공=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지금도 골방에서 제 2의 윌 라이트들이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가졌음에도 '내가 틀리진 않을까'하는 걱정에 밤을 지새울 수도 있습니다. 스토리가, 그래픽이 빈약하다고 자책할지도 모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게임은 이상한 사람들에 의해, 이상한 방식으로 진화해 왔습니다.

윌 라이트는 자신을 천재가 아니라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아이디어가 뛰어난 사람은 많지만 고난을 견디고 세상에 자신을 관철시킬 수 있는 뚝심이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만약 윌 라이트가 세상의 편견을 이기지 못했다면 게임의 모습은 지금 우리가 아는 형태와는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어쩌면 '리그오브레전드' 대신 '리그오브수집형RPG'가 PC방 1위를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리=이원희 기자(cleanrap@dailygame.co.kr)

<Copyright ⓒ Dailygame co, Lt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골프/연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