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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겜문학개론] 게임하는데 이유가 어딨어!

2020년 새해를 맞아 데일리게임에서 새로운 형식의 칼럼을 준비했습니다. 인문학도의 눈으로 게임과 게임 세상 이야기를 해보는 코너입니다. 오랜 기간 게임을 즐겨온 '찐 게이머' 필자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와 연결된 게임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 독자 여러분께 전달할 예정입니다. < 편집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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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애'들의 공간으로 여겨졌던 아케이드 게임장(사진 출처=픽사베이).
[글=신진섭 게임칼럼니스트]다섯 살부터 필자는 '문제적 아이'였습니다. 오락실을 제 집 마냥 들리는 꼬마를 동네 어르신들은 곱게 보지 않았습니다. 엄마 친구, 아빠 동창의 제보가 이어졌고 필자는 그때마다 번번이 체포(?)돼 회초리를 맞아야 했습니다.

게임에 대한 열정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처음 걸렸을 땐 다섯 대로 시작된 매는 걸릴 때마다 다섯 대씩 등차수열로 올라갔는데, 결국 80대까지 가서야 끝이 났습니다. 게임을 끊었냐구요? 아닙니다. 486 PC가 집안으로 들어오면서 굳이 오락실을 갈 필요가 없어졌을 뿐입니다.

예전엔 아케이드 게임장을 오락실이 아니라 '두뇌개발실'이라고 불렀습니다. 자녀가 오락에 빠져 공부를 등한 시할까 두려웠던 부모들에게 '머리가 좋아진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했던 셈입니다. 두뇌개발이란 명분은 앞서 군사정권체제에서 만화, 영화 등 대중문화들이 정부의 철퇴를 맞아 사라져간 것을 본 오락실 점주들의 임시변통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변명의 효력은 얼마가지 않았습니다. 미디어에서 '탈선한 노는 애들'이 모이는 환락과 퇴페의 공간처럼 묘사되는 탓에 필자와 같은 도망자들이 오락실에 즐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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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2월 동아일보에 실린 게임 중독 관련 기사(사진 출처=동아일보).
그런데 생각하면 말이 좀 웃깁니다. '나쁜 애'도 아니고 '노는 애'가 될까봐 어른들은 아이들의 오락실 출입을 두려워했습니다. 아케이드 게임에서 '양아치'나 '일진'이 되는 법을 교육한다면 이해라도 좀 될 텐데 말입니다. 영미권에선 한국의 일진에 대응하는 '불리(Bully)'란 말은 있지만 '노는 애'와 상응하는 단어를 찾을 수 없습니다. '노는 것'은 한국에서만 죄악시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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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막스 베버 저/박문재 역/현대지성.
그렇지도 않습니다. 서구의 프로테스탄티즘에서 비슷한 논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티즘이란 16세기 루터, 캘빈을 주축으로 한 개혁자들을 따라 가톨릭교에 반항한 사람들(protestant: 프로테스탄트)의 신념을 가리킵니다. 프로테스탄트는 철저한 금욕주의를 바탕으로 한 직업소명의식을 따르는데, 근면, 노동, 검약, 정직, 신용을 강조하고 노동을 통한 부의 축적이 곧 신의 명령과 부합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막스베버 저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은 부를 가지고 휴식하고 즐긴다는 것은 허용하지 않으며 금욕적 자본억제에 의한 자본형성을 가능하게 해 이것이 근대 자본주의의 내면을 완성시켰다고 말합니다.

열심히 쉬지 않고 공부하고 일해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이 선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 아닌가요? 7~80년대 골목마다 자리 잡던 건 오락실만이 아니었습니다. 서구에서 수입된 자본주의가 개화하고 있었죠.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진입한 한국은 새마을운동 등 온갖 운동을 통해 국민을 하나로 단결(노동)시키는데 집중합니다. 북한의 천삽뜨기 운동(흙을 천삽 뜨고 허리펴기), 별보기 운동(새벽에 산과 들로 일하러 가서 저녁별 뜰 때까지 일하기)과 대립항을 이루는 장치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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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국민(초등)학생도 조회 때마다 외쳐야 했던 '국기에 대한 맹세'. 아아, 우리는 자본주의 혁명을 위해 분골쇄신해서 국가에게 충성을 다해야 할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조국의 무궁한 영광과는 상관없는 오락하는 이기주의적인 분자는 당연히 죄인이었던 것이었던 것입니다.

서구에서 개신교가 동원됐다면 한국에선 유교가 소환됩니다. '입신양명(立身揚名)', 즉 열심히 공부해 이름을 알리는 것이 효도의 끝이라는 '효경'의 한 문장을 가져오는 것으로 자녀들에게 산업역군이 될 당위성을 불어넣었습니다. 지금이야 한국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 성숙돼, '욜로(YOLO)' 같은 문구도 떠들지만 당시로선 '노는 애'들이나 떠들 불경한 얘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오락을 하는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죄책감을 동반한 즐거움(Guilty Pleasure)'을 느껴야 했습니다. 자본주의 발전에 도움이 안 되는 즐거움이라는 것은 '원죄(Original Sin)'나 다름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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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를 범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이브(사진 출처=픽사베이).
불행히도 역사는 반복됩니다. 아시다시피, 지난해 세계보건기구(WHO)가 게임이용장애를 질병코드로 등록했습니다. 근거가 되는 연구의 질이 낮고, 중독판정이 되는 기준이 과학적이지 않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유교문화권인 동아시아지역에서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에 찬성표를 냈다는 점, 질병코드 등재를 찬성하는 소아정신과의사들, 학부모 단체와 보건복지부는 새마을운동을 하던 시대를 떠올리게 합니다. 더 우울한 건 게임업계의 반박논리도 '두뇌계발'에서 별반 진전이 없었다는 겁니다. 게임은 문화이며 교육적, 기능성 게임도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예를 들어 농경사회를 생각해봐. 모두가 부지런히 밭을 갈고 있는데 돌연 한 마리의 너구리가 나타난 거야. 앗 너구리다. 누군가 소리치면서 일손이 중단되게 마련이지. 귀엽다. 이리온. 해피쫑쫑. (중략) 그런 느낌이란 거지, 원래 너구리는 즐거움 그 자체였으니까. 그리고 한 두어 시간은 온통 너구리가 사람들의 혼을 빼놓는 거야, 그럼 그 텃밭 1팀의 팀장은 어땠겠어? 너구릴 죽이고 싶었겠지." -'카스테라' 中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박민규 저/문학동네-

그런데 우리는 정말 게임을 어떤 다른 무언가를 위해 플레이합니까? 게임이 무언가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목적이 되선 안 되는 걸까요? 역사를 배우기 위해 '대항해시대'와 '삼국지'를, 음악수행평가 점수를 높이기 위해 '디제이맥스'를, 원시시대 사냥문화를 배우기 위해 '몬스터헌터'를, 왕정주의의 폐해를 배우기 위해 '리니지'를 플레이했다고 말해야 한다는 건 이 자체로 비참한 일입니다. 평소엔 즐겨 하지 않았던 기능성 게임들을, 게임산업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방패막이로 소환해야 하는 것도 그렇구요.

현재의 시스템에서 재미는 더 이상 죄악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무언가의 도구라고 자기를 변호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본주의를 둘러싼 환경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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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의 초기버전이었던 '페이스매쉬(FachMash)'. 저커버그도 여학생들을 '얼평(얼굴평가)'하는 이 시시껄렁한 장난이 그를 억만장자로 만들지 상상도 못 했을 거다.
2004년 2월, 대학교 2학년 남학생이 주변의 여학생들의 외모를 비교해보는 홈페이지를 만들었습니다. 둘 중 누가 더 예쁘냐(hotter)를 따져보는 거였죠. 재미를 느낀 대학생들이 몰려들며 홈페이지는 문정성시를 이뤘고, 법인으로 발전, 현재는 삼성전자 시가총액의 두 배를 넘는 글로벌 기업이 됐습니다. 바로 페이스북(facebook)의 설립자 마크 저커버그 얘기입니다. 전 세계가 열광하는 유튜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르지 않는 재미를 제공합니다. TV를 바보상자로, 게임을 사회악으로 폄훼했던 새마을시대의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서비스입니다. 재미는 요즘 가장 인기 있고 잘 팔리는 상품인 셈입니다.

기초적인 의식주가 충족되면, 인간은 '유희'를 추구합니다. 배고프면 먹고 싶고, 밥 먹으면 눕고 싶고, 눕다 보면 자고 싶고, 자고 일어나면 놀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예전엔 먹을 밥도, 쉴만한 공간도 부족해 재미란 가치가 뒷전이었지만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이젠 웬만큼 먹고 살 만큼 사회적 부가 쌓여 잉여사회로 접어들었고, 당연한 수순으로 인간은 재미를 좇게 됐습니다. 입신양명을 위해서라면 무엇보다 재미에 천착해야 되는 사회가 된 셈이죠.

세상 쓸모없어 보이는 기계가 있습니다. 골드버그 장치라고 하는데 생김새나 작동원리는 아주 복잡하고 거창한데 하는 일은 아주 단순한 기계를 말합니다. 그 자체로는 생산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효율성보다는 재미와 기발함을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미 항공우주국 나사(NASA)에서도 우주인들의 상상력 훈련과 위기 대처 능력을 계발하기 위해 골드버그 장치를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골드버그 장치는 게임과 닮았습니다. 수많은 코드와 물리법칙이 구현됐지만 하는 일은 아주 단순합니다. 가능한 한 많은 재미를 주는 겁니다. 골드버그 장치는 사실 쓸모없지 않습니다. 수많은 창의적 발명품들의 단초가 됐습니다. 쓸모없음, 잉여는 때때로 창의로 변모합니다. 쓸모없어 보이는 시도가 창의력의 필요조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즉각적인 생산성을 강조한다는 건, 대부분 기존의 산업 논리를 답습하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니까요.

어머니는 요즘 말씀하십니다. 세상모를 일이라고. 오락실, PC방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필자가 게임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저라고 알았겠습니까? 그냥 재밌으니까 용돈을 갖다 바쳤고, 도서관에서 책도 빌려보고 그랬던 거죠. 재미가 없었으면 대전액션게임에서 기술이 몇 프레임으로 나가는지, RPG(역할수행게임)에서 상성별 전투방식은 어떤지, 분기는 어떻게 되는지, '킹오브파이터즈'의 '미친이오리'를 어떻게 고르는지 암기하고 있을 턱이 없죠. 게임이 무언가의 도구였다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게임을 왜 하느냐고요? 그에 대한 대답은 전설적인 원사운드 작가의 웹툰으로 갈음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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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사운드 카툰 52화 '호드 50' 中 일부.

정리=이원희 기자(cleanrap@dailyga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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