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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게임]


“아, 개운하다.”

아이딘이 비누 냄새가 풍기는 몸을 수건으로 닦았다. 그리고 김이 서린 샤워실 거울에 물을 뿌려 자신의 몸을 비추어 보았다. 빨간 머리에 잘 빠진 몸매. 자신의 눈에도 참으로 조각상 같은 몸으로 비쳐졌다. 어느 한 군데 흠 잡을 곳이 없었다.

“무슨 흉터가 이렇게 많지?”

그런데 몸 구석구석에 누가 낙서라도 해 놓은 것처럼 크고 작은 흉터들이 가득했다. 특히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복부까지 길게 이어진 흉터는 눈에 거슬렸다.

“이 많은 상처들은 뭐지? 군인이었나.”

아이딘은 어깨와 가슴 부위에 연이어 있는 총상 비슷한 흉터 하나를 더듬으며 말했다.

“그냥 다 잊고 사는 게 편할지도 모르겠군.”

과거의 흔적을 발견하게 될수록 기분이 꺼림칙해졌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두통.

그는 과거와 연관되지 않은 지금의 생활이 무척 맘에 들었다. 좋은 것을 놓아두고 나쁜 것을 찾는 바보는 없다. 아이딘은 그냥 지금의 상황에 만족하며 살아가기로 했다.

“이건 또 뭐지?”

그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또 다른 과거의 흔적을 발견했다. 거울을 통해 비추어지는 아이딘의 왼쪽 가슴에 커다란 반점과 작은 점들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십자가 문양의 검은 문신과 알 수 없는 로마문자였다. 혹시나 해서 손가락으로 벅벅 문질러 봤지만 역시 지워질 리가 없었다.

검은 십자가와 X자 세 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이딘은 떠오르지 않는 생각을 굳이 끄집어내려 들지 않았다. 또한 생각하려 해도 생각할 수조차 없다. 파고들면 들수록 밀려드는 두통 때문에 말이다. 그냥 모른 척 잊고 사는 게 편할 듯싶었다.

좁은 샤워실 한쪽 면에 걸려 있는 거울에 김이 서려 뿌옇게 변했다. 아이딘의 모습이 안개에 잠긴 것처럼 잘 보이지 않았다. 그의 기억도 안개에 잠겨 뿌옇기만 하다.

거울 속의 아이딘은 어쩐지 현실의 자신과는 다른 표정을 짓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한 손에 물을 받아 거울에 뿌리려 했지만 그만두었다.

아이딘은 옷을 입고 샤워실에서 나왔다. 거울엔 아이딘의 뿌연 기억처럼 여전히 김이 서려 있었다.

* * *

하루하루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아이딘이 원샷에서 머문 지 어느덧 일주일째. 아이딘은 마을을 한번 둘러보기로 했다.

그에게 시간은 언제나 충분했다. 예리엘이 작성한 빡빡한 노동일과표가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허술하기가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용광로에 펌프질을 해서 쇠를 달구거나 무거운 쇠를 옮기는 것들은 정말 일도 아니었다. 예리엘 기준에서야 하루 종일 걸리겠지만 아이딘, 게다가 호퍼와 잭슨까지 거드니 일과표의 목표량은 금세 끝이 나고는 했다.

예리엘이 의도적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딘이 오전 중에 후다닥 일을 하고 나면 하루의 절반 이상은 따분함의 연속이다. 그래서 오늘은 매일 이곳 원샷으로 출근하다시피 하는 잭슨과 호퍼 두 덩치를 길잡이 삼아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로 했다. 이 두 덩치들도 할 일 없는 백수니만큼 이들에게 시간은 언제나 충분했다.

노만은 작은 마을이긴 하지만 적지 않은 여행객들이 모이는 곳이라 늘 북적거렸다. 하바로프에서 중앙도시 헤이번까지 가는 고속도로의 시발점이 노만 마을이 있는 루디안에 있기 때문이다. 단지 루디안에서도 약간 외곽에 있는 마을이라 주로 돈 없는 여행객들을 상대로 하는 조금은 저렴한 숙소와 상점들이 성업 중이었다. 한편 가난한 뜨내기 여행객들이 많이 거쳐 가는 곳으로 늘 적지 않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곳이기도 했다.

아이딘은 두 덩치와 원샷이 있는 상업지구, 두 덩치들의 집이 있는 주택지구, 경비대 건물과 외곽 쪽에 있는 목재 창고지역과 시장까지 빠짐없이 둘러보았다.

유동 인구가 많다고는 하지만 인구 400명 정도의 워낙 작은 마을이어서 이틀을 내리 돌고 나니 더 이상 관심 갈 만한 곳이 없었다. 단지 주택지구에 새롭게 지어지는 건물들만이 조금 흥미로웠을 뿐이었다.

마을에 대한 흥밋거리도 다 떨어지고 따분해진 아이딘은 이제 잭슨, 호퍼와 함께 지내는 일에 빠져들게 되었다. 막상 예리엘은 늘 바쁘게 일을 하는 데다가 아무래도 남녀지간의 알 수 없는 벽이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얘기만 하면 주된 주제를 아이딘이 갖고 있던 총으로 한정 짓다 보니 괜스레 머리만 아파 올 뿐이다. 그렇지만 잭슨과 호퍼와는 허물없이 쉽게 친해질 수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호퍼와 잭슨 역시 대재앙을 겪고 살아남은 생존자들로서 그때의 기억을 될 수 있으면 하지 않으려고 하는 듯했다. 제대로 들은 것이라곤 기껏해야 세계대회에 나갈 수준의 뛰어난 권투와 레슬링 선수라는 정도밖에…….

아이딘은 더 알아보고 싶었지만 그 둘의 원래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지는 얼굴을 보며 더 이상 알아내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는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처럼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 둘이 살아온 과거에 대해 최소한의 이해를 가질 수 있었다.

대재앙 이후 사람들의 삶은 180도 변모했다. 기존의 가치관과 규율, 법규, 윤리와 같은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 골격은 한순간에 재가 되어 날아가 버렸다. 폐허가 되어 버린 지구 속에 야생과 같은 약육강식이 새로운 기준이 되어 버렸다.

그러한 한편 재앙에 대처하는 인간은 예전보다 현명해졌다. 협력만이 곧 폐허를 딛고 새롭게 일어설 수 있는 새로운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 여느 시절보다 빠르게 깨달은 것이다.

생존자들은 서로가 힘을 합쳐 빠르게 대재앙의 상처들을 복구했으며 조그만 마을이 협력해 도시가 그리고 그 도시들이 서로 협력해 국가가 되어 지금의 루체 왕국과 닉스 연방 공화국의 성립까지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협력이 두 당사자들의 공평한 이익만을 표출한 것은 아니었다.

폭력과 싸움을 통한 지배와 복종 또한 협력의 이름으로 포장된 것이다. 어찌 보면 잭슨과 호퍼 역시 이런 연장선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대재앙 이후의 피폐한 세상을 이겨 내기 위한 폭력과 협박과 같은 그들의 생활방식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렇기에 아이딘은 이런 두 덩치를 어느 정도는 이해하려 했다.

지금 같은 대재앙의 후유증 속에서 윤리와 도덕과 같은 가치를 가지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생각해 봤다. 생존자의 대부분이 다른 사람의 희생이라는 명분하에 자신의 생존욕구를 챙겨 왔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아이딘 자신도, 잭슨과 호퍼도 그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잭슨과 호퍼는 적어도 그런 면에 있어 진실한 면이 있었다.

아이딘은 두 덩치들과의 많은 대화를 통해 서로를 알아 갔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없는 아이딘으로서는 일방적인 서로의 교감이었지만 그들의 거리는 한층 더 가까워졌다. 그렇게 아이딘은 두 덩치와 어울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나름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면서.

* * *

아이딘이 이곳에 온 지 어느덧 3주가 지난 즈음 늦은 저녁.

퍼플 하스피탈은 오늘도 손님들로 북적였다. 시끄럽게 떠드는 손님들 사이에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저녁을 먹는 아이딘과 두 덩치의 모습도 보였다.

이전이었다면 퍼플 하스피탈을 찾은 손님들에게 막연한 거부감이었을 호퍼가 나름 이곳 분위기에 적응한 모습이다. 그가 한동안 행패를 부리지 않고 비교적 얌전히-크게 웃고 떠드는 것은 여전하지만- 지내기 시작하자 다들 어느 순간부터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저녁에서 밤으로 막 넘어가려는 시간. 모처럼 찾아온 퍼플 하스피탈의 평화로운 시간이 흘러가던 그때. 가게 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섰다.

이제 열 살 정도 되었을 법한 어린 남자애 하나가 부리부리하게 뜬 눈으로 홀 내부를 샅샅이 살피며 소리쳤다.

“엄마! 엄마!”

소년은 홀이 떠나갈듯이 소리를 질러 댄다. 그러나 소년의 외침소리에도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상하게 생각한 아이딘이 소년에게 다가갔다.

“너 누군데 여기서 엄마를 찾니?”

“몰라. 비켜.”

소년은 아이딘을 버릇없이 툭 밀치고 홀 안을 휘젓고 다닌다. 소년은 이리저리 테이블을 돌아보았지만 자신이 찾던 엄마가 없던지 이내 고개가 푹 숙여진다.

“미쉘? 꼬마 미쉘이네?”

때마침 화장실에 다녀왔던 예리엘이 미쉘을 발견하고 환하게 반겨 준다.

“꼬마 미쉘, 오랜만이네?”

“쳇, 꼬마는 뺄 수 없나! 예리엘 누나! 엄마 못 봤어?”

미쉘의 질문에 예리엘이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꼬마의 모습을 내내 지켜보던 아이딘이 슬며시 잭슨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 꼬마, 왜 엄마를 찾아다니지?”

“그러니까…… 꼬마의 엄마가 가끔 어디론가 사라져서 말이지.”

“왜?”

“그건…… 나야 모르지.”

잭슨이 그리 말하며 애써 외면한다. 아이딘이 호퍼를 바라보았다. 호퍼 역시 화들짝 놀라 반주 삼아 마시던 맥주를 벌컥 들이켰다. 두 덩치가 뭔가를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딘이 두 덩치를 추궁하려 할 때 미쉘의 목소리가 다시 홀을 울렸다.

“엄마! 엄마!”

역시나 사람들은 잠깐 미쉘을 쳐다보더니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신경 쓰지 않고 술잔들을 기울인다.

“미쉘. 엄마는 여기 없다니까.”

예리엘이 안타까운 음성으로 미쉘을 달랜다.

“알았어. 다른 데로 가 볼게.”

미쉘의 어깨가 축 처졌다. 실망한 얼굴로 돌아서는 미쉘을 예리엘이 불러 세웠다.

“미쉘! 너 아직 저녁 못 먹었지?”

“안 먹어도 괜찮아.”

“그런 게 어디 있어? 어서 밥 먹자.”

“배 안 고프다니까!”

미쉘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런데.

꼬르르르르르르륵!

미쉘의 배는 그의 의지를 부정했다. 미쉘의 얼굴이 붉어졌고, 그의 손을 잡은 예리엘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 * *

미쉘은 종업원이 가져다준 음식을 허겁지겁 두 접시나 먹어 치운 뒤에서야 포크를 내려놓았다.

“하아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풀이 푹 죽었던 미쉘의 얼굴에서 이제야 생기가 돌았다. 모양새를 보니 아마 하루 종일 굶었던 모양이다.

홀 안의 손님들은 엄마를 찾는 미쉘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신나게 떠들어 댔다. 대재앙 이후 엄마를 찾는 아이의 울부짖음을 얼마나 들어 왔던가? 사람들은 무뎌졌고 미쉘도 그중에 한 아이일 뿐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미쉘도 차라리 이런 무관심이 더 편했다. 엄마를 찾으러 돌아다닐 때마다 사람들이 재수 없다고 쫓아내거나 시끄럽다고 미쉘을 박대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간혹 예리엘같이 맘씨 좋은 사람들이 먹을 거라도 챙겨 주며 같이 걱정해 주지만 지금처럼 척박한 시대에 그런 사람들은 그리 흔치 않다.

“잘 먹었어. 이제 가 볼게.”

미쉘이 자기보다 훨씬 높은 의자에서 성큼 뛰어내린다. 그런 미쉘에게 예리엘이 물었다.

“또 엄마 찾으러 돌아다닐 거야?”

“응.”

“항상 못 찾았잖아. 그리고 어차피 내일 아침에 돌아오실 거잖아.”

“그래도 찾아볼 거야.”

“미쉘.”

“누나가 뭘 알아! 내일 아침에 돌아온다고? 그래! 지난주에도 그랬고 그저께도 그랬으니까 오늘도 그러겠지! 그래도 난 싫어! 엄마랑 지금 같이 있고 싶단 말이야! 밤에 혼자 있는 게 싫단 말이야!”

미쉘은 쏘아붙이듯 말하고서 퍼플 하스피탈 밖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예리엘이 잡아 보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미쉘!”

예리엘이 미쉘을 따라 나갔지만 미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느덧 자욱해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호퍼, 어떻게 된 일이지?”

미쉘의 모습을 한참 지켜보던 아이딘이 호퍼에게 물었다.

“사실은 미쉘의 엄마…… 아니, 그러니까 이름이…… 레이나. 그래, 레이나라는 여자 말인데 그 여자한테 좀 사정이 있어서.”

“무슨 사정?”

“빚이 있어서 얼마 전부터 접대부 비슷한 일을 하는 것 같더군.”

“사실은 레이나가 진 빚이 아니라 그 여자 남편이 진 빚이지. 덴젤이라는 놈인데, 남편이라고 하나 있는 게 아무 일도 안 하고 백수로 보내면서 술과 노름에 빠져…… 아주 쓰레기 같은 놈이었어.”

“그래서?”

“빚만 쌓였지 뭐. 처음엔 레이나가 열심히 일해서 어느 정도 버텼지만 헛일이었어. 덴젤은 좀 더 큰 도박판을 전전하다가 결국 인생 아주 종치게 되고 말았지.”

“그래? 그럼 덴젤은 어디 있어?”

“죽었어. 반년 전쯤에 약을 먹었어.”

“한밤중에 침대에 누워 있는 걸 저 꼬마 미쉘이 가장 먼저 발견했다는데. 아마 어린 마음에 상처가 컸겠지…….”

호퍼와 잭슨 모두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다.

“후. 그럼 레이나는 어디에 있는 거야?”

“아마 헥터라고 사채놀이 하는 패거리의 두목에게 가 있을 거야. 헥터는 예전부터 레이나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는데 멍청하게도 덴젤 그 녀석이 헥터 패거리에게 돈을 빌리는 바람에 그 모양이 된 거야.”

강성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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