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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천 이계정복기] 10화

달천 이계정복기 표지
달천 이계정복기 표지
[데일리게임]

술잔인지 술대접인지 모를 커다란 그릇에서 고개를 뗀 달천을 보고 그들은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아, 아닙니다. 말도 없이 술만 마시기에 물어봤습니다.”

고개를 든 달천의 얼굴에는 너무나도 행복한 미소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참, 달튼 씨는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이 질문에 소로본은 살짝 달천을 바라보았다.

“아이미 양이 이번 성인식 동안에 들러야 하는 곳이 있어서 슬리버 왕국 동쪽으로 갈 예정입니다.”

“어머, 동쪽이면 어디를 말씀하시는 거지요?”

첼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달천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쪽에 슬리버 왕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럽다는 규모의 카운티 영지가 있다고 합니다. 아이미 양 말로는 그 영지 안에 꼭 만나야 할 분이 계신다더군요.”

“와아, 이런 우연이. 제가 카운티 영지에 살아요.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전 첼리 드 카운티라고 합니다.”

“성이 카운티라 하심은 혹시 그쪽 영주님의 따님?”

아이미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이, 언니 말씀 편하게 하세요. 네, 맞아요. 영주님이 제 아버지세요.”

이런 대화를 주고받자 모든 일행들은 문득 떠오른 듯,

“저희도 그러고 보니 정식으로 인사해야겠군요. 전 제퍼슨 드 카운티입니다.”

“전 라일리 드보르 쿠엘싱.”

“소로본이에요.”

소로본은 못마땅하다는 투로 간단히 이름만 말했다.

“크로케 앙리 기네문이요.”

달튼은 이들이 그냥 단순한 명문가 자식들이 아니고 상당히 이름 있는 귀족들의 자제라는 것을 알았다. 플래너에게 들은 최근 슬리버 왕국의 귀족들 명단에 올라 있는 이름인 것만 보아도 보통은 넘는다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달튼 씨도 정식으로 소개해주시죠?”

“아, 저는 먼저 밝혔듯이 이름이 그냥 달튼입니다.”

순간 좌중은 고요해졌다. 그들은 달튼이 여행자라 해도 아이미가 그를 대하는 태도나 그의 예의바른 말투 등으로 미루어 설마 그가 성도 없는 평민일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해보지 않은 것이다. 유심히 귀를 기울이던 소로본의 눈가에 살짝 실망이 보였다.

“그렇다면 달튼 씨는 평민인가요?”

“그렇습니다.”

짤막한 대꾸에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지금까지 귀족인 줄 알고 존칭을 써가며 지냈는데 이제 와서 태도를 돌변하기에도 조금 개운치 않은 면이 있었다.

“어이, 너희들.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나. 우리가 각자 개성이 달라도 한 파티를 이루게 된 것은 다른 귀족들과는 다르게 살자는 취지가 맞아서였잖아. 달튼 씨가 아니었으면 어쩌면 우리는 숲에서 인생을 마감했을지도 몰라. 난 이제부터 달튼 씨를 나이든 지위든 따지지 않고 친구로 여길 거야. 달튼, 이런 나를 친구로 받아줄 거지?”

평소 먹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던 크로케가 침을 튀겨가며 일장 연설을 하는 것을 보고 모두들 놀라고 말았다.

“친……구……라고?”

친구, 이계에 와서 이상한 인연으로 플래너를 친구로 삼기는 했지만 그때와는 또 다른 감정으로 친구라는 단어가 가슴에 와 닿았다.

달천은 사람을 친구로 사귀어본 적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 크로케 말이 맞아. 앞으로 슬리버 왕국을 이끌 우리들에겐 커다란 이상이 있잖아. 나도 크로케 말에 동참하겠어. 친구!”

“나도 그래.”

“전 오빠라 부를게요.”

소로본을 제외한 모두가 평민인 달튼을 친구로 인정하고 있었다.

“자네들 그 말 진심인가?”

다시 한 번 다짐하듯 묻는 달튼의 질문에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달튼은 우리의 영원한 친구다.”

그들은 절대 술기운에 이런 것은 아니었다. 물론 아직 세상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면이 많기에 가능한 결정인지는 몰라도 그들에게 달천은 이제는 정말 친구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으허허헝! 어무이!”

그들의 그런 외침에 감정이 북받친 듯 달천은 통곡을 터뜨렸다.

“아니, 자네 왜 그러는가?”

모두들 달천이 울음을 터뜨리자 어리둥절하고 말았는데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달천은 스스로 눈물샘이 말라버렸다고 생각해왔다. 철이 든 이후 자신의 주변에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다는 걸 알았을 때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고 오로지 늙수그레한 사부한 분만이라도 모시고 잘살아보자고 결심했다.

잠시 지냈던 사람 사는 마을에서 또래 아이들한테 손가락질 당하고 집단구타를 당했을 때도 그는 울지 않았다. 그나마 오랜 시간 자신을 돌봐주던 사부가 돌아가셨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눈물을 흘렸던 그가 지금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지금까지 얼마나 외롭게 지내왔는지 보여주는 일면이기도 했지만 나이만 많지 그의 마음은 아직도 순수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 달튼은 이 시간 이후부터 자네들의 친구가 될 것이며 나의 친구가 되었다는 것은 내 목숨과 같은 사람들이 된 것이니 누구든지 자네들을 괴롭히면 내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을 이 자리를 빌어서 천명하는 바이네.”

무엇인가 몹시 거창하고 어색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달천의 너무 나도 진지한 표정과 행동에 이들은 알 수 없는 감동의 물결이 밀려옴을 느꼈다.

지금껏 누가 친구를 사귐에 있어서 저렇게 진지했는가. 친구가 좋다는 것은 알지만 과연 얼마나 저처럼 뜨거운 다짐을 할 수 있었는가.

“나 라일리도 이 시간 이후부터 내 친구들을 내 생명처럼 여기겠다.”

모두가 하나였다. 비록 생각이나 성격은 달라도 이들은 다짐했다.

결코 변치 않는 우정을 쌓아가자고…….

이들의 곁에서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미의 눈가에도 반짝이는 이슬이 비쳤다.

하지만 이들은 한 가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그들이 오늘 맞아들인 새로운 친구가 알고 보면 무지 오래 살아온 노인네이기 때문에 자신들은 지금 엄청나게 손해를 보고 있다는 것을.

또한, 이 친구로 인해 자신들이 꿈꾸던 미래가 꿈으로만 끝나지 않게 될 것임도.

이렇게 격정의 시간이 지나고 이들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자, 오늘같이 좋은 날 제대로 마시지 않을 수 없지. 여기 술이란 술은 있는 대로 다 가져와라.”

점원을 향해 크로케는 기분 좋게 소리 질렀다.

“우리도 이번 졸업 논문만 제출하고 나면 졸업무도회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조만간 다시 만나자.”

“흠, 그래. 아이미 양과 나도 카운티 영지만 들렀다가 오면 특별히 할 일이 많은 것도 아니니…….”

“달튼 오빠, 전 논문 제출이 끝나면 제퍼슨 오빠랑 바로 영지로 돌아가요. 우리 갈 때까지 다른 곳으로 가시면 안 돼요.”

난생처음 들어보는 오빠 소리에 헤벌쭉해진 달튼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이후에 오빠랑 아이미 언니 일이 끝나면 다시 왕국으로 함께 가면 좋을 것 같아요.”

처음부터 친근감이 들었던 달튼이 이제 가까운 사이가 되자 첼리는 마치 친동생처럼 살갑게 굴었다. 모두들 이런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야, 달튼인지 달통인지 하는 너!”

그동안 조용히 있던 소로본이 벌떡 일어나더니 달천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좋게 말할 때 잠깐 밖으로 나와.”

“저기, 소로본. 갑자기 왜 그래? 이 좋은 자리에서…….”

소로본의 성질머리를 잘 아는 그들은 바짝 긴장했다.

“너희들은 알 것 없고 이건 나와 달튼의 문제이니 걱정 말고 술들이나 마시고 있어. 잠깐 이야기만 할 거니…….”

달튼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부르는 것을 보고 소로본도 달튼을 인정했다는 사실에 일단은 안심하는 그들이었다.

2

산이 가까이에 있는 작은 마을의 밤은 가벼운 바람에 실려 오는 맑은 공기도 즐거움을 주지만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무엇보다도 매력적이다.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바람결에 살짝 나풀거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보면서 알 수 없는 감정의 기복을 느끼고 있는 달천이었다.

“당신, 정말로 우리랑 친구 할 거야?”

휙 돌아서며 소로본은 거짓말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잘 몰라서 그런 말을 하나 본데, 난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 아니야. 어려서부터 일단 꺼낸 말은 책임지는 편이었거든.”

종잡을 수 없는 성격에 때로는 가벼워 보이는 그였지만 이 말이 결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난 당신이 누군지 몰라. 내 친구들도 마찬가지고. 분위기에 휩쓸려 친구 하기로 말들은 하지만 난 순수한 그들이 다치는 건 싫어.”

항상 땍땍거리고, 성깔 부리는 그녀로만 알려져 있었는데 의외로 속이 깊다는 걸 보여주는 말이었다.

“흐음, 그 말은 정체도 알 수 없는 내가 귀족 친구들을 만들어서 이용이라도 할 거라는 뜻이야?”

“그런 말은 아니야. 우리가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르긴 하지만 상대가 불순한 목적으로 접근했는지 정도도 판단 못할 바보들은 아니거든. 단지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걱정스러운 것 일 뿐…….”

달천은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플래너를 통해 대화의 기법이라든가 상대 의중을 파악하는 기술 등을 전수받았다 해도 실전 경험이 없는 것이다.

사실 그녀가 정말로 달천을 멀리하려 했다면 이렇게 자연스럽게 말을 놓고 대화할 리도 없는데 천연기념물 1호감인 270살짜리 숫총각인 그가 이러한 여심을 눈치 챈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내 눈을 봐.”

말이 궁해진 달천이 갑자기 그녀의 팔을 잡아 그녀를 자신의 얼굴로 바짝 끌어당겼다.

“푸훗!”

무엇인가 진지한 분위기를 연출하려 했던 달천은 당황했다. 자신의 진실을 전하는 강렬한 눈빛을 보고 웃다니…….

“당신 눈은 볼수록 웃겨. 어쩜 사람 눈이 그렇게 생겼니.”

소로본은 갑자기 유쾌해졌다. 그의 모습을 보며 이 사람은 결코 악한 사람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생각해보니 지난번 오우거 사건 때도 보통 그 정도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으면 그 오우거를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달랐다. 비록 무지막지 하게 두들겨 패긴 했지만 그것은 왠지 사람들에 대한 경고성 구타가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이 들었다. 하찮은 몬스터조차도 생명을 아껴주는 그라면 절대 악인일 수 없다는 것인데.

그러나 그녀에게 결정적인 확신을 갖게 한 것은 반달눈을 가진 악인이 있다는 상상을 해보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든 탓이었다.

“내 눈이 어때서? 우리 사부가 나처럼 매력적인 눈은 세상에 없을거라 했구만. 쳇.”

“어머, 사부님도 계셔?”

소로본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봤다. 라켄 대륙에선 사부를 모신다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웬만한 사람들이 함부로 제자를 둔다는 것도 그렇고 최소한 이름깨나 나지 않고는 사부 행세를 못하기 때문이다.

“음, 돌아가신 지 오래됐어.”

“아, 미안해. 몰랐어.”

“괜찮아, 오래전 일이라 별로 그립지도 않은데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자신을 그렇게 고생시키던 사부의 얼굴이 갑자기 미치도록 보고 싶어졌다.

“에잇. 이놈의 동네는 무슨 놈의 밤벌레들이 저렇게 꽥꽥대며 우노.”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한 것 같아. 난 소로본 앙뜨 페르미느야. 앞으로 잘 부탁해.”

침울해진 그의 감정을 느꼈는지 밝은 목소리로 악수까지 청하는 그녀는 발랄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지난번에 성질만 고치면 왕자도 청혼한다던 친구들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미모로만 논한다면 그녀는 슬리버 왕국뿐 아니라 라켄 대륙 전체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

운 축에 속했다.

“그리고 이제야 말하지만 지난번에 구해줘서 고마웠어.”

쪽!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달천의 얼굴에 살짝 입 맞추고 그녀는 팔랑팔랑 일행들이 있는 숙소 쪽으로 사라져갔다.

그런데 우리의 달천.

이름 모를 작은 시골마을을 그 자리에서 영원히 지키리라 맹세라도 했는가. 완전히 뻣뻣하게 굳은 채 넋이 나가버렸다. 가만히 보니 얼빠진 상태에서도 콧구멍은 벌렁거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방금 사라진 그녀의 향기를 조금이라도 더 맡기 위함이 아닐까?

“소로본, 혹시 달튼을 데리고 나가서 어디 묻어놓고 온 거 아니야?”

둘이 나가서 혼자만 들어오자 매우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제퍼슨이 말했다.

“숨까지 거친 것을 보니 정말 그런가 보네.”

옆에서 거드는 라일리.

“너희들 죽을래?”

소로본은 자신이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남자에게, 그것도 본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사내에게 아무리 볼에 했다지만 뽀뽀를 하다니…….

‘내가 갑자기 미쳤지. 아이, 창피해라.’

쾌활하던 그가 침울해 보이자 알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했던 자신의 이해 못할 행동. 평소 자신 앞에서 아부 떠는 자들 때문에 남자라면 넌덜머리나던 그녀 아니었는가.

‘친구가 우울해해서 위로 차 그런 건데, 뭐.’

재빠르게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정신을 수습하는 그녀였다.

“그런데 이 친구는 정말 왜 안 오는 거야?”

“나도 몰라. 바람이라도 쐬러 간 모양이지.”

끼이익.

이때 문이 열리며 달천이 들어왔다.

“아니! 이봐, 달튼. 왜 그러나?”

라일리의 놀람에 찬 외침에 이어 사제답게 제퍼슨이 원인까지 말하며 놀랐다.

“헉! 저 증상은 흑마법사들이 주로 쓰는 정신지배술에 당한 모습인데…….”

얼굴은 시뻘개져서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눈동자는 풀려 있는 것이, 아닌 게 아니라 보통 심각한 상태가 아닌 듯했다.

“어머, 달튼 씨, 이게 웬일이에요?”

평소 침착하고 차분하던 아이미까지 놀라서 비명을 지른다.

“헤헤헤. 아무이 아이니 거저 말아요.(아무 일 아니니 걱정 말아요).”

저 증상의 원인제공자인 소로본도 덩달아 얼굴이 빨개졌다. 당사자가 별일 아니라 하니 좌중은 일단 다시 자리를 정돈했다.

“거참 희한하네. 방금 전만 해도 멀쩡히 나갔던 사람이 왜 저모양이 됐지? 혹시 지병이라도 있나?”

“이봐, 달튼. 혹시 지병이라도 있으면 말하게. 내가 왕국에 돌아가면 바일리 대사제관님께 자네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할 테니.”

“저도 마법서적을 몽땅 뒤져서라도 오빠 병을 고칠 수 있는 포션을 만들어볼게요.”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들의 지나칠 정도의 걱정에 그때야 달천은 제정신이 돌아왔다.

“아하하! 내 잠시 자네들 놀려주려고 연기한 걸세. 어때? 실감 났는가?”

“이 사람이 지금, 우린 정말 깜짝 놀랐잖아. 또 한 번 그러면 가만 안 둘 거야.”

“너 연기도 좋지만 제발 입가에 흐르는 침이나 닦아라.”

달천은 바로 이런 것이 사는 맛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홀로선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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