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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탈리퍼 4화

메탈리퍼 4화
[데일리게임]
그때 빨간 머리의 차가운 눈빛이 번뜩인다. 그 차가운 눈빛에 순간 호퍼의 움직임이 멎는다. 그의 이마에서 어느덧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린다.

‘예사로운 놈은 아닌 것 같은데…….’

호퍼는 단번에라도 달려들고 싶지만 빨간 머리의 움직임에는 빈틈 하나 없었다.

“뭐 하는 거야? 덩치만 커 가지고.”

빨간 머리가 호퍼를 자극하지만 호퍼는 허리의 통증마저 미처 가시지 않은 상태다. 자신도 모르게 순간 멈칫한다.

그런 그를 응시하는 주변의 시선들이 따갑게 느껴진다. 호퍼의 자존심이 더 이상 시간에게 양보를 구하기는 힘들었다.

“잘 만났다. 너 이 자식!”

호퍼가 잠시 멈추었던 주먹을 휘두른다. 하지만 빨간 머리는 그의 주먹을 기다렸다는 듯이 너무나 쉽게 피해 버린다. 호퍼의 두 번째 주먹이 연이어 허공을 가르는 순간, 바짝 안으로 파고든 빨간 머리가 녀석의 명치를 경쾌하게 강타한다.

“커허억!”

너무나 강한 주먹이었다. 마치 쇠망치에 맞은 듯이. 명치를 정통으로 얻어맞으니 하늘이 노래진다. 좀 전보다 더 큰 아픔으로 호퍼는 그대로 쓰러지려 한다.

턱!

빨간 머리가 그런 호퍼의 뒷덜미를 사뿐히 틀어쥐었다. 정신을 놓고 축 처진 호퍼를 질질 끌고 가 술집 밖으로 던져 버린다.

탁탁!

빨간 머리가 손을 털며 돌아섰다. 그러자 잠시 정적에 휩싸여 있던 홀 여기저기에서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휘이익!

짝짝짝짝짝!

“이야, 내 속이 다 후련하네!”

“저 자식, 덩치만 컸지 별거 아니었잖아.”

사람들의 환호성에 빨간 머리는 특유의 불타는 듯한 빨간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빙그레 웃으며 답례한다.

예리엘이 빨간 머리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어.”

예리엘은 어제 자신의 총을 빼앗는 빨간 머리의 빠른 동작을 보긴 했었지만 이 정도일지는 몰랐다. 얼핏 봐도 두 배의 덩치는 되어 보이는 거구를 저렇게 아이 다루듯이 끝내 버리다니.

“남은 것 마저 먹자.”

빨간 머리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리에 앉아 다섯 번째로 시킨 요리인 사슴 스테이크의 마지막 조각을 입에 넣는다. 예리엘 역시 자리에 앉았지만 잠시 전의 소란 속에서 더 먹을 수 있는 기분은 아니었다.

“이것도 먹을래?”

예리엘이 자신의 접시에 있는 스테이크를 빨간 머리에게 건네주려 한다.

“어. 고마워.”

빨간 머리는 사양하지 않고 자신의 접시에 받아들인다.

얼마 후 그들이 자리에 일어설 때 빨간 머리의 자리에 다섯 접시, 예리엘 역시 다섯 접시가 깨끗이 비워져 5:5 동점으로 식사를 끝마쳤다.

식사를 마치고 원샷으로 돌아오는 짧은 시간 동안 서로가 아무 말도 없었다. 원샷에 들어온 빨간 머리와 예리엘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작업대를 경계 삼아 양쪽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러고 나서 한참이 지나고서야 서로의 어색한 침묵을 깨뜨렸다.

“늦었긴 하지만 아까는 고마웠어.”

“응, 뭐 아무것도 아닌데 뭘.”

“그런데 너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는 거야?”

“그렇다니까.”

“좋아. 어차피 기억이 날 때까지 이곳에 있기로 했으니까. 그리고 내 이름은 예리엘 글라이스너야. 그냥 예리엘이라고 불러.”

“알았어. 예리엘. 예쁜 이름이네.”

“그럼 너는 뭐로 불러야 하지?’

“그냥. 네가 편한 대로 불러.”

“그래.”

예리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한 이름을 말한다.

“아이딘. 아이딘이 좋겠어!”

“아이딘?”

예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이 있는 거야?”

“응. 아이딘은 전설적인 건스미스의 이름이었어.”

아이딘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 예리엘의 얼굴이 약간 상기되었지만 빨간 머리는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며칠 신세 지다 떠날 텐데 소소한 것까지 굳이 관심을 둘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딘…….”

빨간 머리는 자신의 새로운 이름을 읊조려 보았다. 그리 나쁘지 않은 느낌이다. 눈치를 살피던 예리엘이 이름을 확정지어 버린다.

“괜찮으면 그럼 아이딘으로 할게.”

“…….”

이제 아이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빨간 머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 자러 가야겠어.”

아이딘이 먼저 테이블에서 일어난다. 예리엘도 동시에 일어나 아이딘의 뒤를 따른다. 아이딘은 자신의 뒤를 따르는 예리엘을 슬쩍 쳐다보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간다.

창고 밖에서 철그렁, 쇠사슬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린다.

“또 잠그는 거야?”

“…….”

쇠사슬 소리도 잠시 멈춘다. 그러나 이내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잠겼다.

* * *

아이딘이 원샷에 머물기로 한 두 번째 날.

예리엘은 아이딘의 예상과 달리 아무 일도 시키지 않았다. 그저 뒤편에서 자신이 일하는 것을 지켜보게만 했다. 당장이라도 엄청난 일을 시킬 것 같던 첫날의 반응하고는 딴판이다. 게다가 아침도 넉넉히 차려 줘서 배도 든든하니 마음이 편했다.

오늘도 아침부터 여러 손님들이 찾아왔다. 간단한 손질부터 아이가 총구에 구슬을 넣어 총구가 막혔다는 의뢰까지, 적지 않은 일들이 들어왔다. 예리엘은 즉석에서 처리가 되는 일들은 빠른 손놀림으로 마무리했고 튜닝과 막힌 총열에서 구슬을 빼내는 것과 같이 시간이 걸리는 일들은 뒤로 좀 미루어 두었다. 아이딘은 그 총들의 겉을 닦거나 수리대 옆에 있는 거치대에 조심스럽게 가져다 놓는 일이 전부였다.

점심시간이 되어서도 손님이 몰리자 예리엘은 손님들 주려고 만든 비스킷이라도 먹으라면서 통째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지금 아이딘은 그 비스킷을 점심 대용으로 열심히 먹고 있다.

“음. 맛있다. 정말 맛있네.”

원샷에 단골이 많은 이유는 비단 예리엘의 미모 때문만이 아니었다. 물론 그녀의 눈웃음과 아름다운 금발 머리, 그에 어울리는 파란 눈동자는 아주 먼 거리에서도 한 번쯤은 찾아와 볼 만큼 상당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면 손님이 이렇게까지 몰려들진 않을 것이다.

원샷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또 하나의 비결은 아이딘이 먹고 있는 바로 이 보리 비스킷이었다. 아이딘에게도 예리엘이 만든 비스킷은 일품이었다. 고소하고 바삭한 맛이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더불어 포만감 또한 최고였다.

총을 수리하는 시간 동안 심심하지 말라고 주전부리로 비치한 이 비스킷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그래서 어떤 손님들은 단지 이 비스킷을 먹으려고 그냥 원샷에 와서 정비를 맡긴다는 이야기까지 들릴 정도였다.

바쁜 와중에도 예리엘은 꼼꼼하게 목이 메지 말라고 아이딘에게 음료수까지 챙겨 주었다.

‘정말 부지런하네.’

쉴 틈도 없이 움직이는 그녀를 보며 아이딘은 그렇게 생각했다.

원샷은 작업장과 손님을 맞는 카운터가 일체로 붙어 있는 형태였다. 커다란 작업대가 있어 공간 활용에는 효율적이지만 작업 도중에도 손님들이 찾아오면 그때마다 하던 일을 멈춰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러나 예리엘은 이미 그런 일들에 익숙해져 있는지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응하며 빠르게 움직였다.

손님 몇 명이 구석에 있는 아이딘이 누구냐고 말을 건넸지만 예리엘은 어설픈 웃음으로 먼 친척 오빠가 잠깐 도와주러 왔다고 둘러대곤 했다.

그런 예리엘의 모습을 바라보던 아이딘은 관심의 대상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궁금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엉켜 버린 실타래를 쉽게 풀 수 없는 것처럼 스스로에 대한 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운동선수? 군인?’

이것은 기억이 아닌 경험으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머리 하나 이상은 차이 났던 그 거구를 너무나 쉽게 제압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냥 본능적으로 그 덩치가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을 만큼 알 수 없는 자신감 또한 가득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아니 어떻게 이곳에 왔을까?’

역시나 떠오르지 않는다. 아이딘은 생각의 테두리를 넓히기로 했다. 자기 자신이 아닌 주변에 대해 기억해 내려 했다. 그러나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며칠 전 그가 잠에서 깨었을 때 주변은 온통 나무들이 뒤엉킨 숲 한가운데였다. 그리고 온몸이 부서질 듯이 아팠다. 팔다리가 부러졌는지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그는 숲 한가운데서 꼬박 이틀을 보냈다. 이틀이 되었는지 그 이상이 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냥 해가 두 번 지고 두 번 졌다는 것만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틀째가 돼서야 팔과 다리에 힘이 들어가게 되면서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다. 걸을 수 있게 되면서부터 꼬박 이틀을 숲에서 벗어나기 위해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러고 나서야 사람의 흔적을 찾았고 이틀 전에야 비로소 이 마을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막연한 불안감과 함께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떠올렸다.

현재는 서기 2043년 대재앙 이후의 지구. 지금부터 10여 년 전 지구는 대재앙이라 통칭되는 연이은 사고와 대지진으로 기존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대대적인 지각변동을 통한 화산폭발과 지진, 해일 등은 인류가 겪었던 그 어떤 자연재해보다 위력적이고 공포스러웠다. 총 64억 명의 사망자. 인류의 생존자는 고작 20%에 불과했다. 그리고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루체 왕국과 닉스 연방 공화국. 두 국가는 대재앙 이후 생성된 새로운 국가 조직이었다. 적어도 아이딘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어도 자신이 닉스 연방에 있다는 것을 눈치로 알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아이딘이 가진 기억의 전부였다. 흩어진 기억을, 자신의 과거를 되찾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마침 잠시 한가해진 예리엘이 아이딘에게 다가왔다.

“무슨 생각해?”

“예리엘. 여기는 어디지?”

뜬금없는 질문에 예리엘이 눈을 깜빡이며 답한다.

“여기 원샷.”

“아니, 그거 말고 여기 지명 같은 것.”

“아. 여기는 닉스 연방 하바로프의 루디안 구역이야. 더 정확히 말하자면 루디안 내에서도 노만이라는 마을이지.”

“그렇구나.”

하바로프, 루디안, 노만…….

아이딘은 자신이 몸 두고 있는 현재의 장소를 되뇌었다.

‘닉스 연방의 하바로프라.’

예리엘의 그 말이 묻혀 있던 아이딘의 기억 중 한 가지를 끄집어내 주었다.

닉스 연방은 9개의 연방국가로 이루어졌다. 하바로프는 그중 하나였다. 그리고 닉스 연방은 현재 루체 왕국과의 전쟁 중이었다. 하바로프는 그런 루체와 전쟁을 벌이는 최전선이다. 그러나 더 깊은 생각의 연결고리를 펼치기도 전에 예리엘이 자르고 나섰다.

“이렇게 빈둥거리는 건 여기까지. 이제 일 좀 하지.”

그녀가 창고 옆에 있는 자그마한 용광로를 가리킨다.

“아니, 저건 용광로 아니야? 뭐 하려고?”

“총열에 박힌 구슬을 좀 빼려고.”

“그냥 쇠꼬챙이로 꾹꾹 눌러서 빼면 안 되나?”

“잘못하면 강선에 흠이 가지.”

“그럼 그냥 총알 넣고 쏘면?”

“뭐 손이 날아가고 싶으면 그렇게 하시든지.”

“용광로로 뭘 어떻게 하려고?”

“일단 총열을 넣고 가열하면 자동으로 구슬이 녹을 거야.”

“그래? 그냥 녹는다고?”

“유리는 녹는점이 1천 도, 총열이 녹으려면 2천 도 이상이니 문제없이 유리가 녹아서 흘러나올 거야.”

“아아. 그렇겠네.”

“쉽지는 않을 거야. 용광로가 좀 구형이라 펌프질 좀 해야 할 거야.”

예리엘이 용광로의 불을 댕기자 아이딘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힘차게 펌프질을 하기 시작한다. 아이딘의 힘찬 펌프질에 용광로에 불이 활활 타오른다.

“제법 잘하는데…… 금방 끝날 수 있겠는데.”

쭈욱쭈욱 올라가는 용광로의 온도계를 바라보며 예리엘이 활짝 웃는다. 힘차게 펌프질을 하는 아이딘도 화답하듯이 활짝 웃었다.

* * *

“어떻게 되었나?”

수없이 많은 모니터들이 층층이 탑을 쌓고 있는 커다란 연구실.

어두운 공간을 가르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기분 나쁘게 울려 퍼진다. 목소리의 주인은 그 사람의 지위를 보여주는 듯한 큼지막하고 안락한 의자에 앉아 수없이 많은 모니터에서 쏟아져 나오는 정보창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이번에는 놓쳤습니다.”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놓쳐?”

모니터를 바라보던 피곤에 지친 듯한 알트마이어 박사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뒤엔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렉셀 밀러스 박사가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왜?”

단 한 마디지만 정곡을 찌르는 알트마이어의 말에 렉셀의 고개가 더욱 깊이 숙여졌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은 필요 없네.”

“…….”

“다른 실험체들은 몰라도 ‘그 녀석들’만큼은 반드시 처치해야 하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우리에게 반복되는 실수는 더 이상 없는 거네!”

“알겠습니다.”

알트마이어는 애써 대꾸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입구를 바라본다. 렉셀이 한 번 더 고개를 깊이 숙인 뒤 연구실을 나갔다.

홀로 남은 알트마이어는 모니터에서 잠시 눈을 뗀 체 피곤한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꾹 누르다 신경질이 나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 녀석…… 그 녀석들만이 아니었다면 이미 모든 게 끝이 났어.”

알트마이어는 분에 못 이긴 듯 자리를 배회하다 어느덧 진정이 되었는지 모니터에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현란한 그래프가 모니터 속에서 춤을 춘다. 얼마간 모니터를 응시하던 알트마이어는 또다시 무엇이 못마땅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연구실 밖으로 거칠게 뛰쳐나간다.

주인 없는 어두운 연구실, 수많은 모니터들의 불빛만이 어른거렸다.

강성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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