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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게임]

5화

지금으로선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가장 쉬운 대처법이 있긴 한다.

실은 다른 행성에서 이와 비슷한 상황에 부닥쳤던 경험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다.

“실은 제가…….”

재희는 말을 흐렸다.

“기억을 잃었습니다.”

가장 간편한 방법은 이거다.

되는대로 둘러댔다가 들통 나기라도 하면 더 곤란해질 테니까.

“기억을 잃었다?”

카일은 의외라는 눈치였다.

그 증거로 그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었을 거다.

“예. 기억을 되찾을 만한 단서를 찾기 위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처지입니다.”

“흐음.”

“그러다 숲속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었는데, 우연히 소리를 듣고 여기까지 닿게 된 겁니다.”

“저런.”

라미로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야? 고향이 어디인지, 직업이 무엇이었는지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잠자코 듣던 카일이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지금은 어디로 가던 참인가?”

재희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저 발길이 닿는 데로 나아갈 뿐입니다.”

그 짤막한 한 마디와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진 표정만으로도 두 사람은 재희가 느끼는 심정을 족히 짐작할 수 있었으리라.

막막함.

어디로 가야 할지, 누굴 만나야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지조차 모른다면 그야말로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기분일 것이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셈이니까.

“잠시 기다려 주겠나?”

카일은 재희에게 양해를 구한 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라미로와 조용히 의논하기 시작했다.

‘이만하면 됐겠지.’

재희는 그런 두 사람을 슬쩍 살폈다.

사실 처음 해 본 짓도 아니다.

덕분에 이런 종류의 연기도 제법 능숙했다.

두 사람이 어떠한 주제로 열띤 의논을 나누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있었으니까. 둘의 대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대화를 마친 카일이 다시금 재희에게 말을 걸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지금까지 받은 인상만으로도 그가 길게 말을 늘여놓는 타입이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당분간 우리 부대와 동행할 생각은 없나?”

“예?”

재희는 놀라서 되물었다. 물론 정말로 놀랐던 건 아니다. 그런 척해야 할 타이밍이니까.

“솔직히 말하면 우리 부대엔 자네 같은 실력자가 필요하네. 아까도 봤다시피 자네가 아니었다면 더 많은 병사를 잃었을 테지.”

“······.”

“강요할 생각은 없네. 또한 그대가 부대를 떠나고 싶다면 얼마든지 떠나도 좋다. 다만 함께하는 동안만큼은 적어도 배를 곪지 않게 해 줄 수 있겠지. 새 옷도 마련해 줄 수 있을 테고.”

그렇게 말하는 카일은 재희가 걸친 누더기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거기에 합당한 봉급도 지급하도록 하지.”

카일이 쐐기를 박았다.

적어도 겉보기에 재희는 무일푼의 방랑자였다.

그 흔한 배낭 하나 없는 차림새를 보면, 제대로 끼니를 때우고 다니는지도 의문이다.

카일은 재희에게 부족한 것들을 제공해 줄 수 있었다.

무심한 척 제안을 던졌으나, 솔직히 카일은 눈앞의 재희가 탐이 났다.

훌륭한 인재다.

투창술 하나만 놓고 보면 기사급의 실력이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100미터 밖에서 2등급 머슬의 머리를 일격에 날려 보낼 수 있는 자는 그리 흔치 않다.

“어떤가?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생각하는데.”

재희가 대답을 망설이자, 카일이 보채듯 물었다.

‘괜찮군.’

제안을 거절하거나 흥정을 유도하기 위한 의도적인 망설임은 아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덥석 받아들여도 모양이 살지 않으니까. 단지 그뿐이다.

“그렇게 하지요.”

재희는 무덤덤하니 카일의 제안을 승낙했다.

이들은 군인이다.

군인이라면 전투를 치러야 할 일도 많을 터. 성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재희에게 발판이 될 무대를 마련해 줄 수 있으리라.

“좋군.”

카일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라미로.”

“네.”

“제이에게 장비를 지급해 주도록 하게. 인원이 부족한 조(造)에 이 아이를 배치하면 될 것 같군.”

“알겠습니다. 그런데 부대장님?”

명을 받드는 라미로는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재희의 시선을 의식한 것인지, 카일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저 청년을 좀 더 요긴하게 쓸 생각이 아니셨습니까? 실력에 합당하는 지위를 내려주신다면, 저 아이도 쉬이 부대를 떠나려 들지 않을 겁니다. 병사들의 통솔을 맡기긴 어렵겠지만, 정예병 정도라면······.”

“굴러온 돌이 제 윗자리를 꿰찬다면 누구라도 기분이 좋진 않겠지.”

“아······.”

라미로는 그런 카일의 말이 어떠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대체로 병사들은 출세욕이 강하다.

이 세계에서 평민들이 지위를 거머쥘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낮은 자가 높은 자리로 올라서기 위해선 그만한 대가가 필요한 법.

그들에겐 뇌물을 바칠 돈도 뒤를 봐줄 인맥도 없다.

괜히 목숨을 내걸고 자진해서 입대하는 게 아니다. 영웅은 전장에서 탄생하기 마련이니까.

아무튼. 출세를 위해 전장에 뛰어든 병사들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재희에게 순순히 상관 대접을 해 줄까?

그렇지 않다.

생전 처음 보는 녀석이 느닷없이 윗자리를 꿰차고 앉는다면 병사들이 그에게 어떤 악감정을 가지게 될지 뻔하다.

“출중한 자는 어떻게든 제 존재감을 돋보이게 되어 있다. 저 아이가 활약을 거듭한다면 병사들도 그를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

“과연 그렇군요.”

“떠날 마음을 품은 자는 어떻게든 떠나게 되어 있다. 돈과 지위로 사람의 마음을 붙잡기 시작하면 탐욕에 눈이 멀어 버리고 말지.”

카일이 라미로를 아끼는 이유도 그런 데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라미로는 능력만으로 보면 당장 부대장의 자리에 앉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다.

뒷배도 충분한 편이다.

에를렌 가문은 공직에 앉은 자들이 많았으니까.

그가 일찍이 가문의 위세를 빌렸다면, 진작 부대장 자리를 꿰차고도 남았으리라.

어쩌면 지금쯤 카일보다 높은 곳에 있었을지도.

그런 라미로가 굳이 이곳에 머무르는 이유는 이 부대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기 때문이었으리라.

‘못 들은 체하기도 힘드네.’

재희는 지나가듯 생각했다.

수백 년을 전쟁터에서 뒹굴다 보면 자의와는 상관없이 오감이 예민하게 벼리어질 수밖에 없다.

흐릿한 먹구름을 바라보며, 그는 머쓱하니 둘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라미로를 따라 도착한 곳은 임시 막사였다.

병사들이 지친 데다가 부상자들이 적지 않았던 탓에, 일단은 이 평원에 진을 세워 두기로 한 모양이었다.

보초를 서던 병사가 허리를 곧게 펴고 라미로를 향해 경례했다.

병사의 시선은 라미로가 아닌 재희를 향해 있었다. 내색하진 않았으나, 그 눈빛만큼은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들어와.”

천막을 걷으며 라미로가 그에게 손짓했다. 막사 안으로 들어서자, 갖가지 장비들이 가득했다.

창은 물론이고 철퇴며 활과 화살. 검과 갑옷들까지. 이 자리에 없는 무기를 떠올리는 게 더 힘들 정도였다.

“여기서 원하는 장비를 가져가도록 해.”

재희가 쥔 몽둥이를 힐끔 쳐다본 라미로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적어도 그 몽둥이보다는 괜찮을 테지.”

“좀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물론.”

라미로가 흔쾌히 승낙하자, 재희는 본격적으로 막사 내의 장비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가 푸른빛을 발하기 무섭게, 장비들에 대한 간략한 정보들이 각막을 가득 채웠다.

예상했던 대로 질이 좋은 장비들은 아니다.

능력을 향상해 주는 것도 없었고.

이 막사에 있는 것들은 모두 병사들에게 지급되는 장비일 가능성이 높았다.

기사들의 장비는 자신들이 따로 보관하고 있을 테니까.

“흐음.”

재희는 한구석에 놓여 있던 검의 날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겼다.

팅.

칼날이 작게 울었다.

역시나 탁하다.

그리 좋은 소리는 아니다.

날이 우는 소리 하나만으로도 대략 어느 정도 수준의 무기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검?”

검을 집어든 재희를 보며 라미로는 고개를 갸웃했다. 의외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당연히 창을 선택할 줄 알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라미로가 재희의 실력을 두 눈으로 본 건 창을 던졌던 모습이 전부였다.

“원래 창을 선호하는 편은 아닙니다.”

“그거 놀라운걸.”

라미로는 이채를 띠었다.

그렇다면 선호하는 무기로는 과연 어떤 실력을 보여 줄지 무척이나 기대된다는 눈빛이었다.

창은 지나치게 길고, 철퇴는 둔한 감이 있다.

그는 길이도 적당하고 베고 찌르기에 모두 수월한 검을 애용하는 편이었다.

‘전부 애매한데.’

안타깝게도 여기에 있는 무기들은 하나같이 그의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

지금껏 명장들이 만들어 내는 희대의 무구들만을 선별하여 애용해 왔던 그였다. 나중엔 그 명장들의 작품들로도 만족하지 못해서 직접 무구를 제련하기도 했었고.

그런 재희의 눈에 이런 하찮은 보급품들이 성에 찰 턱이 있을 리가.

물론 장비를 지급해 주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큰 기대를 품었던 건 아니었기에, 규격만 맞는다면 적당히 하나를 골라잡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가 세워 둔 최소한의 기준에 들어맞는 녀석조차도 눈에 띄지 않았다.

‘길이가 아쉽단 말이지.’

의외로 그런 무기는 흔하지 않았다. 재희는 전형적인 동양인의 체형이었다.

반면 이들은 서양인에 가깝다.

그보다 좀 더 키가 컸고 몸집도 재희보다 큰 경우가 많았다.

그런 체격에 맞춰 보편적으로 제작된 무기들이니 재희에게는 적합하지 않을 수밖에.

‘어쩔 수 없나.’

그렇다고 없는 무기를 따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할 처지도 아니었다.

결국 그는 처음 집었던 검을 선택했다.

아쉬운 대로 개중에서 가장 괜찮은 녀석을 고르기로 했다.

재희는 16조에 편성되었다.

적게는 일곱에서 많게는 열 명까지 조원이 편성되는 것 같았다.

재희가 막사에 들어서자, 호기심 어린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는 조용히 빈자리를 찾아 앉았으나, 병사들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심심하던 차에 흥밋거리를 찾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머슬을 잡았다는 녀석이 너구나?”

옆자리에 앉은 병사 하나가 알은체를 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재희는 씩 웃으며 겸양을 떨었다.

“부대장님이 스카우트하셨을 정도면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 같진 않은데.”

“제이라고 했었지? 반갑다. 너같이 실력 있는 녀석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잘 부탁한다.”

병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말을 걸어왔다.

삽시간에 유명 인사가 되어 버렸다.

만일 카일이 처음부터 재희를 귀빈 취급했다면 그들은 호기심이 아닌 경계심을 표출했을 거다.

부대원들은 대체로 연령대가 높은 편이었다.

적게는 20대 중반에서 많게는 40대까지.

그도 그럴 것이, 여러모로 미숙한 어린 신병들은 전투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태반이 죽어 나가기 일쑤다.

이 자리에 있는 병사들은 우여곡절 끝에 각자 터득해 낸 방식으로 수많은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들인 셈이다.

한 마디로 산전수전 다 겪어 본 병사들.

그런 그들에게 재희는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였다.

정민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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