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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탈리퍼 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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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게임] 사실 그보다는 아이딘을 철저히 조사해 보라는 거듭된 상부의 지시가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하, 피곤하네.”

아이딘의 심문을 맡게 된 미하일 중위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별것도 아닌 일에 이렇게 진을 빼고 있는 자신이 한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좁고 어두운 심문실에서 작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이딘과 마주한 채 앉아 있던 것도 벌써 반나절이 다 되어 가는 중이었다.

“이봐, 정말로 기억이 안 나는 거지? 그렇지?”

경비대 소속의 중위라면 적어도 이 작은 마을에 있어 꽤나 높은 지위다. 떠돌이 아이딘에게 필요 없는 존칭은 사용하지 않았다. 아이딘 역시 이를 전혀 불쾌감 없이 받아들였다.

“네. 전혀 기억이 안 나요.”

“휴, 거짓말 같지는 않은데…….”

그래서 더 답답했다. 차라리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면 상부의 지침대로 물리적인 힘을 가해서라도-자신이 선호하는 방식은 아니지만- 더 깊게 추궁을 할 텐데 적어도 아이딘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대재앙을 겪으면서 아이딘과 같이 과거를 잊고자 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삶의 터전을 잃고 실성해 버리거나 정신적 충격으로 과거의 기억을 본의 아니게 잃어버린 사람들을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이딘도 그런 부류 중 하나일 것이라고 미하일도 생각했다.

그렇다고 섣불리 그를 석방할 수도 없었다. 상부에서 아이딘에 대한 철저한 조사 지시가 두 번이나 연달아 내려왔기 때문이다. 한 번이라면 몰라도 두 번씩이라면 단지 뇌물을 바라는 란돌 대장의 의중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확실한 결과 없이 아이딘을 풀어 주었다가 괜히 사고라도 생긴다면 큰일이 생길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미하일이 고민의 한숨을 푹 쉬었다. 그때 아이딘의 뱃속에서 천둥번개가 내리쳤다.

꾸르르르르르륵!

미하일이 깜짝 놀라 아이딘을 바라보았다.

“너 또 배, 배고프냐?”

“네. 배가 고프네요…….”

“너 좀 전에도 배고프다고 해서 잔뜩 먹었잖아.”

“그건 그거고요.”

아이딘이 빙그레 웃었다. 미하일 중위는 끝없이 먹어 대는 또 다른 괴물 때문에 울고 싶어졌다.

* * *

예리엘과 두 덩치, 그리고 레이나와 미쉘은 아직 영업도 시작하지 않은 퍼플 하스피탈의 홀에 모여 아이딘을 걱정하고 있었다.

오늘 하루 원샷의 문은 닫기로 했다. 아이딘이 경비대에 소환된 후 예리엘은 마음이 영 편치 못해 가게 문을 열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아이딘을 다시 빼내 올 수 있을까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호퍼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 평소에 좀 착하게 지낼 것을. 경비대에 인맥만 있었어도 일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잭슨이 호퍼를 바라보며 긍정의 눈빛을 날렸다. 거칠게 살아온 그들에게 격한 후회가 밀려오는 시점이다.

“호퍼, 넌 그래도 컴뱃 아카데미에 발이라도 들여놓지 않았었냐? 경비대에 아는 사람 없나.”

“그게…… 한 달도 안 되어서 사고치고 쫓겨나서…….”

고개 숙이며 말을 하자 잭슨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눈을 흘긴다.

컴뱃 아카데미 출신들의 처우가 예전만 못하다고는 하지만 그 영향력은 아직도 무척 센 편이다. 기초 군사 훈련뿐만 아니라 다양한 서바이벌 스킬은 험난한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데 가장 요긴한 기술이자 학문이며 생계수단이었다.

그 외에도 군인이나 용병 같은 힘 있는 실세인 인맥들과 연결되어 있어 누구나 한 번쯤은 고려해 볼 만한 곳이다. 적어도 그들과 연계되어 있다면 좀 더 수월하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이렇게 손 놓고 기다릴 수밖에 없으니.”

레이나가 힘없이 얘기한다. 미쉘이 그런 레이나의 손을 잡으며 엄마를 위로한다.

“엄마 기운 내. 좋은 방법이 있을 거야.”

예리엘은 안쓰러운 얼굴로 두 모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음 또한 아이딘을 걱정하는 저 두 사람에 못 미칠 바가 아니었다. 아이딘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운 감정이 예리엘의 마음을 우울하게 했다.

“예리엘, 무슨 일 있어? 왜 이리 시끄러?”

“어, 페이 언니.”

정오가 넘어서야 일어난 페이가 부스스한 표정으로 예리엘에게 다가온다. 그리고는 호퍼와 잭슨을 훑어본다.

“영업도 시작하지 않은 매장에 너야 상관없지만 저 녀석들까지는 좀 너무한 거 아니야?”

“미안해, 언니. 그렇지만 호퍼랑 잭슨이랑 예전 같지 않아. 그렇지?”

호퍼와 잭슨은 예리엘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덩치는 얌전한 아이들처럼 기가 죽어 다시 한 번 페이의 눈치만 살핀다.

“무슨 일인데 아침부터 이렇게 소란스럽니?”

“언니…… 아이딘이 경비대에 끌려갔어요.”

“어. 네가 좋아하는 그 빨간 머리가?”

“언니, 그런 게 아니라니까 정말…….”

예리엘의 얼굴이 붉어지며 정색을 하며 말한다. 호퍼와 잭슨은 애써 모르는 척한다.

“뭘 그렇게 정색까지 하고 그래? 아니면 말고…… 호호호, 그래서?”

“벌써 삼 일째 경비대에 불려갔어요. 오늘은 아예 아침에 경비대가 끌고 가서 풀어 주지 않을 기세예요.”

“나도 얘기 들어서 알고는 있었는데, 머리 좀 아프겠는걸?”

“언니, 어떻게 하면 좋죠?”

“전쟁 중이다 보니 떠돌이들에 대한 보안도 강화되었고, 무엇보다 경비대장님이 요새 돈이 많이 필요하신가 봐?”

“네?”

“들리는 소문에 끔찍이 아끼는 애인도 생기셨다는걸?”

페이의 말에 모두의 귀가 쫑긋한다.

“돈 뜯어내기에는 떠돌이가 최고지. 문제 생겨도 신고도 못하지, 여차하면 처리해 버리기도 쉬울 테고.”

페이가 죽인다는 뜻으로 목을 손으로 쭉 긋는 제스처를 취한다.

“그럼 빨리 돈을 마련해야 할까요? 얼마나 많이 필요할까요?”

예리엘이 다급하게 묻는다.

“호호호. 얘는 뭘 그리 겁을 먹고는. 걱정하지 마. 언니가 다 처리해 줄 테니까. 내 큰 짐을 덜어 준 친구기도 하니까.”

그녀가 예리엘에게 살짝 윙크를 한다.

“거기 미련하게 힘만 센 덩치, 너 이리 와 봐.”

잭슨과 호퍼가 쭈뼛쭈뼛하며 동시에 페이 앞으로 다가간다.

“너 말고 너.”

호퍼와 잭슨이 또 동시에 다가선다.

“에휴. 너 말이야.”

호퍼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자신이 맞느냐고 손짓하자 페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좀 이따가 나랑 같이 갈 곳이 있어.”

호퍼는 영문도 모른 채 고개만 끄덕였다.

* * *

“이게 뭔지 아시죠?”

노만 마을의 경비대장 란돌이 페이를 앞에 두고 좌불안석이다.

루디안의 경비대장 란돌은 그리 신사적이지는 않은 사람이다. 치안을 책임지는 책임자이면서 동네 유부녀들에게 치근덕거리기 일쑤였고 동네 건달의 잘못도 뇌물 봉투에 눈감아 주는 등 권력에 빌붙어 사는 전형적인 지방 관료의 모습이다.

그런 그가 마치 매너 있는 신사처럼 페이를 앞에 두고 최대한 품격을 갖추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다른 어떠한 것도 필요 없고 아이딘을 풀어 주셨으면 하는데요.”

“아. 그런가요?”

알 수 없는 묘한 긴장감에 란돌은 존댓말을 쓰고 말았다.

란돌의 눈앞에는 헥터가 경비대장 란돌을 포함한 경비대원에게 상납한 모든 내역이 상세하게 적혀 있는 뇌물 장부가 펼쳐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차용증은 이미 헥터 패거리와의 싸움 때 모두 불태워 버려졌지만 뇌물 장부를 포함한 몇몇 서류들은 아이딘이 헥터와의 싸움 직후 호퍼에게 넘겨주었다. 호퍼는 영문도 모르고 그걸 가지고 있다가 오늘 페이에게 가져다준 것이다. 그 행낭 속에 있던 헥터의 뇌물 장부가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다.

란돌은 자신의 앞에 놓인 장부를 보며 입안이 바싹바싹 탔다. 설마 설마 했는데 이 경비대 찬조금 내역 장부-뇌물장부-가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 헥터 사건 이후 모두 불태워졌다고는 들었지만 확실치 않아 께름칙하고 불안했는데 아예 눈앞에 그 장부가 펼쳐져 있다 보니 한편으로는 오히려 잘되었다 싶었다.

생각 같아서는 눈앞에 놓인 장부를 얼른 낚아챈 뒤 모른 척해 버리고 싶었지만 뒷부분이 반 찢겨 있는 장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는 다름 아닌 페이였다.

“그게 좀…….”

란돌이 말을 이었다.

“상부에서 거듭 조사 지시가 내려와서 그냥 쉽게 처리할 수가 없는 문제라서…… 내 권한을 많이 벗어나기도 하고…….”

여타의 건과 달리 이번 사건에 대한 상부의 압박은 다른 어떤 일들과도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란돌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사건인 듯싶었다. 쉽게 처리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 이 장부의 나머지 반을 대장님이 말씀하시는 상부에 제가 보내 볼까요?”

란돌의 얼굴이 사색이 된다. 그에게 있어, 아니 노만 마을 수백 명의 경비대원에게 있어 그 장부는 사라져야 마땅했다. 그 장부가 공개되는 순간 다들 옷 벗는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문득 지난주 새롭게 내려온 전시 훈령에 전쟁기간 중 전후방을 막론하고 민간인에 대한 피해를 입히는 군인은 총살로 즉결 심판한다는 내용이 란돌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서 지난주부터 민간인에게 지불해야 할 대금이나 늦어진 대금까지도 억지로 다 지급했건만, 이건 정말 진퇴양난이었다.

“아니, 어떻게든 내가 처리해 볼 테니…… 일단은 시간을 좀 두고…… 상부의 관심과 독촉이 워낙 심해서…….”

“경비대장님. 너무하시네요. 제가 이렇게까지 말씀드렸는데도…….”

페이의 화난 듯한 표정에 아무 말도 못하고 있던 호퍼까지 잔뜩 주눅이 든다.

“호퍼, 너 먼저 나가 있어.”

호퍼가 페이와 란돌의 눈치를 보더니 슬금슬금 문을 열고 밖으로 빠져나간다.

“페이, 제발 이러지 말고…….”

란돌은 어떻게든 페이를 설득하려 하는데 페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란돌도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난다.

“경비대장님이 정 이러신다면 제가…….”

“어? 어…….”

당황하는 란돌 대장에게 페이가 다가가 갑자기 키스를 한다. 엉겁결에 키스를 당한 란돌은 어쩔 줄 몰라 하다 이내 페이와 함께 한참을 부둥켜안고 떨어질 줄을 모른다.

잠시 후.

“더 길게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요. 빨간 머리가 풀려나면 나머지 반은 제가 알아서 처리해 드릴게요.”

란돌은 넋이 나간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럼. 경비대장님 다음에 또 봬요.”

페이가 손 키스를 날리고는 보라색 단발머리를 흔들거리며 문을 나섰다.

미하일 중위가 싱글거리며 전화를 받고 있었다.

“아, 네…… 죄송합니다. 제가 진즉에 알았었다면 좀 더 빨리 끝냈을 텐데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부터 좀 더 신경 쓰겠습니다. 네. 네.”

전화를 끊은 미하일이 부리나케 심문실로 들어왔다. 아이딘은 그가 조금 전에 갖다준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어이, 진작 말하지 그랬어.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네?”

아이딘이 빵 한 조각을 뜯어 입에 한가득 넣고 우물거리며 미하일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경비대장님의 친척이라면서. 진즉에 말을 하지.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괜히 진을 뺐네.”

아이딘이 머리를 긁적였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 움직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신원이 명확해졌으니 가 봐도 돼.”

미하일은 장시간의 따분한 심문이 끝나 아이딘이 신나서 밖으로 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아이딘은 또다시 빵 한 조각을 뜯으며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가도 된다니까.”

의아해진 미하일이 그리 물었다. 이에 아이딘이 빵을 입안에 가득 물고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이거 다 먹고요.”

* * *

부우웅.

노만 마을 외벽 북문 입구로 군용 지프 한 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안에는 아이딘이 타고 있었다.

경비대장 란돌로부터 친절하게도 아이딘이 곧 도착할 거란 전갈을 받은 예리엘과 두 덩치, 레이나가 외벽 인근까지 나와서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왔다!”

군용 지프를 발견한 호퍼가 신이 나서 외쳤다.

일행 앞에 멈춰 선 지프에서 아이딘이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에 모두가 달려가 아이딘을 반겼다.

강성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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