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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탈리퍼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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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게임]
대재앙 이후 제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사실 제정신으로 사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저런 미치광이는 어디에나 흔했다.

헥터는 그냥 그를 보내 줄까 생각했다. 하지만 마치 자신을 비웃는 듯 히죽거리는 그의 모습에 분노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헥터의 수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저 녀석한테 분풀이라도 좀 해야 속이 풀릴 것만 같았다.

헥터가 그나마 멀쩡한 오른손으로 자신들의 유일한 무기이자 생명줄인 서바이벌 나이프를 챙겨 들고 미치광이에게 다가갔다. 미치광이는 곧 죽임을 당할 자신의 처지도 모르고 겁 없이 다가오는 헥터를 보며 여전히 실실 웃고만 있었다.

헥터가 미치광이에게 빠르게 단검을 찔러 넣었다. 부상을 당했어도 한 마을을 오직 힘 하나로 좌지우지했던 헥터였다. 격투에 있어 민첩함 하나만은 여전했다. 그러나 모두의 눈앞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퍼석!

“……어?”

“대, 대장……?”

뭔가 이상했다.

헥터의 몸이 엄청난 힘에 가격이나 당한 듯 휘청하며 땅바닥에 쓰러진다. 하늘을 보고 쓰러진 헥터의 입에서는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온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정황을 파악할 겨를도 없었다.

‘설마 이 녀석이.’

헥터의 수하들이 머뭇거리는 순간 미치광이 녀석이 또다시 헤죽거리며 다가온다. 그러자 맨 앞에 서 있던 헥터의 수하 클로버가 또다시 피를 뿜으며 쓰러진다. 이번에는 모두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널브러진 헥터와 클로버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니…… 어떻게 맨손으로…….”

그제야 눈앞의 상황을 인지한 헥터의 수하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려 했다. 순간 미치광이의 눈에서 시퍼런 불꽃이 일었다. 그리고 숲속에 연이어 퍼지는 단말마가 헥터 패거리의 최후를 대신했다.

* * *

아이딘은 이제 노만 마을에서 꽤나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마을 사람을 괴롭혀 왔던 헥터 패거리를 마을에서 쫓아내고 레이나와 미쉘을 도와준 사실이 참견쟁이 잭슨의 입을 타고 온 마을에 빠르게 퍼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아이딘이 일하는 건스미스 원샷 역시 평소보다 곱절은 많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단지 예전엔 가게를 찾는 손님들의 대부분이 남자였다면, 지금은 절반 이상이 여자였다.

그녀들은 오빠나 남편, 아버지의 총을 들고 원샷을 찾아오고는 했다. 심지어 아침에 아버지가 손질한 총을 그대로 저녁에 다시 가지고 오는 철없는 아가씨들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그들 모두가 단지 아이딘을 보기 위해 원샷을 찾은 것이다.

“아이딘! 여기 좀 봐 줘!”

“꺄악! 아이딘이 방금 날 보고 웃었어!”

원샷 카운터에서는 아이딘을 바라보고 흥에 겨워 자지러지는 활달한 여인네들의 소리가 그치지 않고 들려왔다. 아이딘은 애써 외면하는 척하면서 작업장 귀퉁이에서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일을 했다.

요란 떠는 아가씨들을 피해 애써 가게 한구석에 앉아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예리엘의 표정이 왠지 뚱해 보였다.

“되게 재밌나 보네.”

예리엘이 혼잣말을 하는데 귓전에서 낯익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호라?”

깜짝 놀란 예리엘이 몸을 돌렸다. 잭슨과 호퍼, 두 덩치가 언제 다가왔는지 예리엘의 옆에 서서 히죽거리고 있었다.

“뭐야, 너희들?”

예리엘이 정색을 하며 묻자 호퍼가 키득거린다.

“헤헤, 눈에서 레이저 나가겠네.”

“뭐?”

“지금 아이딘에게 질투하는 거야?”

“질투?”

예리엘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질투였었나? 잘 모르겠다. 아이딘에게 딱히 질투를 느껴야 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그녀가 갸우뚱하자 참견쟁이 잭슨도 가세했다.

“표정 보니까 딱 알겠는데 뭘. 너 혹시 아이딘에게 관심 있는 거 아냐?”

“무슨 소리!”

“얼굴에 다 써 있네 뭘…….”

예리엘이 뾰로통해하며 버럭 한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예리엘의 대답에 두 덩치가 파안대소한다.

“에이. 왜 화를 내고 그래. 그냥 그렇다는 거지 뭐.”

“그래그래, 알았어. 뭐 그렇게 화까지 내고 그래…… 푸하하하!”

호퍼가 호탕하게 웃고서는 잭슨과 함께 아이딘이 일하는 작업대로 자리한다. 아이딘은 아직까지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동네 아가씨들과 희희낙락이다.

“예리엘, 저 남자에게 관심 있는 거니?”

“어…… 언니 언제 왔어?”

이번에 예리엘을 부른 건 페이였다. 페이는 예리엘이 앉아 있는 카운터 앞 의자가 마치 오래 전부터 자신의 의자였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걸터앉았다.

페이는 예리엘이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퍼플 하스피탈의 주인이자 의사이기도 했다. 퍼플 하스피탈의 약간 변태적일 수도 있는 종업원들의 간호사 복장은 바로 이 페이의 작품이었다. -그녀들이 실제 간호사이기도 한 것이 더 놀랍긴 하지만- 몸을 치료하는 병원도 중요하지만 마음을 치료하는 병원도 중요하다며 퍼플 하스피탈을 직접 운영한다고 한다.

예리엘이 애써 딴청을 부리며 페이에게 물었다.

“아, 언니. 일은 어땠어? 잘 다녀온 거야?”

페이는 최근 닉스 연방 서쪽 끝에 있는 네바다까지 다녀오는 대규모 목재 수송단의 수행 의사로 며칠간 자리를 비운다고 했었다.

“응, 오늘 아침에 돌아왔지. 근데 대답은 안 하고 딴소리하기야?”

“그래, 네바다는 괜찮은 거 같아?”

“정말 계속 딴소리만 하네?”

“헤헤헤.”

예리엘이 쑥스럽다는 듯이 배시시 웃는다.

“오빠는 잘 있더라. 그런데 네바다도 많이 바뀌어서 예전 같지는 않아.”

“그렇구나…… 매번 고마워, 언니.”

“너도 한번 가 봐야 하지 않을까?”

“…….”

예리엘이 고개를 숙이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저 남자 이름도 아이딘이야? 우연치고는 아주 공교롭네.”

“으응…… 그렇게 돼 버렸네.”

예리엘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가 다시 펴졌다. 그런 표정 변화를 페이가 알아차렸다는 것에 조금 민망했는지 금발머리를 살며시 긁적였다. 그 모습에 페이 역시 피식 웃는다.

“아, 그런데 언니. 머리 했어?”

“참 빨리도 물어본다. 예쁘니?”

페이가 보라색 단발머리를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예리엘이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응, 예뻐. 정말 잘 어울려.”

“그래? 정말이지?”

페이가 손님용으로 준비해 놓은 보리 비스킷 하나를 깨물어 먹는다.

“으흠…… 맛은 여전한데 그래. 그런데 예리엘. 요즘엔 괜찮아?”

“뭐가?”

“너 가끔 안 좋은 꿈꾸는 거…… 이번에 나 없을 때는 괜찮았니?”

“…….”

예리엘은 매번 악몽에 시달릴 때마다 페이에게 한걸음에 달려가 밤새 같이 있어 달라고 졸라 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정말 이제 괜찮은 거야? 걱정 많이 했는데…….”

“으응, 이제는…… 좀 괜찮은 거 같아.”

“오오, 정말이야? 그러면 난 이제 두발 쭉 뻗고 푹 자도 되겠네. 큰 걱정 하나 덜었는걸.”

“…….”

예리엘의 얼굴이 또 한 번 붉어졌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악몽 때문에 잠을 설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너무 무서워 잠을 청할 수가 없을 때에는 곧잘 페이의 집으로 달려가곤 했었다. 물론 페이는 그때마다 싫은 내색 한 번 없이 예리엘을 꼭 안아 주었다.

페이가 얼마 남지 않은 비스킷 바구니를 뒤적이며 아이딘을 턱으로 가리킨다.

“그런데 저 남자 있잖아, 오늘 마을에 도착하고 보니 이 좁은 마을에서 온통 저 남자 이야기뿐이던데.”

“응…… 그러게 말이야…….”

아이딘은 아까부터 굳이 카운터가 아닌 작업대 앞에까지 와서 총기를 기다리는 여자 손님들로부터 추파를 받고 있었다. 아이딘도 이를 의식한 듯 5분이면 끝날 일들을 30분째 붙잡고 있었다. 그냥 방청유 묻은 천으로 총기 외부를 닦는 5분도 안 걸리는 일이 그렇게 오래 걸릴 수도 있다는 것을 예리엘도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다.

페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입가엔 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너 혹시 저 남자 마음에 드는 거니?”

“에? 말도 안 돼.”

“저 미련한 덩치들도 다 알고 있는데 뭐.”

예리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그런 거 아니야.”

예리엘이 팔을 붕붕 휘두르며 애써 부인했다.

“그래? 그럼 내가 좀 꼬셔 봐도 상관없는 거지?”

“무슨…… 언니 마음에도 없는 말하지 마.”

예리엘이 정색을 한다.

모처럼 재회한 두 아가씨가 수다를 떨고 있을 때 아이딘이 뭇 여성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예리엘의 옆자리에 섰다.

“예리엘. 가서 설명 좀 해 줘. 몇 분째 계속 물어보는데 뭘 알아야 대답을 해 주지. 왜 안 가고들 저러고 있지?”

아이딘이 약간 짜증나고 지친 듯한 목소리로 말을 한다.

“어, 그래? 알았어. 페이 언니 잠깐만.”

예리엘이 후다닥 작업대로 옮겨 간다. 아이딘이 페이를 쳐다본다.

“아까부터 봤는데 혹시 예리엘의 친구?”

페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처음 보는데 누구?”

“아…… 어디 좀 멀리 다녀왔거든. 나 페이야.”

“아.”

얼핏 예리엘에게 친한 언니가 있다고 들은 기억이 났다.

“혹시 예리엘한테 관심 있어?”

아이딘이 뜬금없는 페이의 질문에 당황한다.

“아니, 무슨 소리예요?”

아이딘이 무안하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작업대로 향한다. 예리엘도 마침 설명을 끝마치고 페이에게로 다시 돌아와 앉았다.

“후후후…… 예리엘. 쟤도 너 좋아하는 거 같은데?”

“무슨 소리야? 이제 장난 그만해, 언니.”

“뭐 한집에 살면서 그렇게 정이 드는 거지. 너무 부끄러워하지 마.”

“그만하래도, 언니. 자꾸 그럼 나 화낼 거야.”

예리엘이 뾰로통해진다.

“그래, 그래, 알았어. 이제 내 임무는 다 끝난 거네. 이제 든든한 기사님이 생기셨으니 말이야.”

예리엘은 초승달 모양의 눈웃음을 보이며 활짝 웃는 페이가 이유 없이 얄밉게 느껴졌다.

* * *

어느덧 깊은 밤이 되어 원샷의 하루가 막을 내렸다. 오늘은 먼 곳으로 떠났던 목재 수송단이 돌아와 그 어느 때보다 손님이 많아 매우 분주한 하루였다.

닉스 연방 영토 중 하바로프에서 가장 먼 거리에 위치한 도시인 네바다까지의 수송이었던 만큼 수송단의 규모 또한 다른 가까운 지역을 왕래하는 수송단들에 비해 규모가 훨씬 큰 편이었다. 덕분에 경호 인력도 많았고 그들이 소지했던 총기들이 한꺼번에 들어오다 보니 원샷 역시 쉴 틈 없이 바빠져 늦은 밤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일을 마칠 수 있었다.

간단한 주변 정리를 마치고 문을 걸어 잠근 뒤, 아이딘과 예리엘은 여느 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각자의 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내일 새벽부터 경비대에 출장을 가야 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리엘은 조금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몸을 침대에 눕히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과거의 예리엘은 늘 오빠 아이딘과 함께였다.

대재앙 때 모든 가족을 잃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피붙이라고는 오빠 아이딘뿐이었다. 예리엘과 아이딘이 사는 이곳, 네바다의 이름은 거대한 사막이 자리했던 네바다에서부터 유래했지만 지금은 수풀과 곡식이 잘 자라는 곡창지대로 탈바꿈했다.

오염되지 않은 많은 대지와 풍부한 수원들은 수많은 생존자들을 이곳으로 끌어 모았다. 예리엘과 그녀의 오빠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그날도 다른 날과 같이 아이딘과 함께였다. 아이딘은 아침 일찍부터 의뢰받은 총들을 수리하고 있었다. 건스미스는 대재앙 이전에 자동차 회사의 엔지니어였던 아이딘에게 낯선 일일 수도 있었지만 그는 금세 적응했으며 나름 그 방면에 소질과 두각을 드러냈다.

나름 평화롭고 안정된 시간이 흘러갔다. 적어도 그날까지는 그랬다. 그 녀석들의 습격이 있기까지는.

오빠가 약혼을 한다는 사실에 예리엘은 못내 못마땅했었다. 예리엘은 그 사실을 안 다음부터 오빠 아이딘에게 심하다 싶을 정도로 퉁명스럽게 굴었다.

강성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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