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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게임] 가까이 다가온 아이딘이 아직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잭슨에게 돌연 손을 건넨다. 이 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잭슨이 잠깐 고민했지만 그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제 그만하고 우리 친하게 지내는 게 어때?”

생뚱맞은 아이딘의 말에 두 덩치의 눈과 귀가 쫑긋한다.

“내가 딱히 갈 곳도 없고 해서 여기 좀 머물러야 하거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그냥 친구나 하자.”

그렇게 말하며 아이딘이 상냥하게 웃는다. 두 덩치는 아이딘이 자신들을 놀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눈치만 살피며 눈만 동그랗게 떴다.

“자. 어서…….”

아이딘이 오른손을 호퍼에게도 건넨다.

“어때. 이것도 인연인데.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니까…… 싫어?”

호퍼가 머뭇머뭇하며 잭슨의 눈치를 본다.

잭슨은 생각해 본다. 이 이율배반적인 상쾌한 패배의 느낌. 얼마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인가?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를 만났을 때의 짜릿한 두려움과 설렘 섞인 도전. 그리고 깨끗한 패배와 라이벌을 향한 경외.

잭슨 자신이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자신의 기억들이 하나둘 다시금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녀석이 자신의 예전 기억을 되살리며 마음을 이끈다.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잭슨이 덥석 아이딘의 손을 잡는다. 눈치를 보던 호퍼 역시 아이딘의 손을 잡는다. 아이딘이 부드럽고 강한 힘으로 두 덩치를 일으켜 세운다. 두 덩치는 자신의 팔로 전달되는 엄청난 힘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힘에 흐르는 따뜻한 친밀감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 * *

예리엘은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새벽부터 경비대에 있는 중기관총의 수리를 의뢰받아 갔는데 이번에도 또 수리비 지불을 뒤로 미루었기 때문이다. 저번에도 수리비를 미뤄 놓고 이번에 또 미루다니 정말이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아무래도 경비대장 란돌이 또 수작을 부린 모양이다.

경비대원들의 교대시간에 맞추어 작업을 하기 위해 새벽부터 아침도 먹지 못하고 일을 시작했는데 또 수리비 정산을 미루자고 하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예리엘은 경비대에서 집으로 걸어오는 내내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리고 원샷에 들어온 순간 지금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호퍼는 의자에 올라서 천장에 깜박거리는 전등을 교체하고 있었고 잭슨은 바닥을 청소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딘은 그런 두 덩치에게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호퍼! 거꾸로잖아. 그래서 그게 들어가겠어.”

전구 앞뒤도 구분 못하는 호퍼에게 아이딘이 쏘아붙인다.

“알았어, 알았어!”

“잭슨! 저쪽 바닥 아직도 더럽잖아!”

“아, 죄송, 죄송.”

동네에서 제일가는 망나니 녀석,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자신의 가게를 손보고 있으니 깜짝 놀랄 일이었다. 예리엘이 가게에 들어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잠시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다 예리엘이 아이딘에게 묻는다.

“아이딘, 무슨 일이야?”

“어, 다녀왔어? 뭐, 아무것도 아니야.”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저 녀석들이 왜 내 가게에서 설치고 있는 거지?”

“우리 그냥 친하게 지내기로 했어. 서로 도와 가면서. 그렇지?”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던 두 덩치가 뻘쭘하게 억지웃음을 짓는다. 예리엘이 사실을 더 추궁하려 했지만 두 덩치가 굳이 말썽을 부리는 것도 아니니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한참을 지켜본 후에도 예리엘은 이 상황이 명확히 이해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노만 마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잭슨이 어떤 악당이었는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호퍼 녀석에게는 바로 어젯밤 예리엘 역시 곤란한 일을 당하지 않았는가? 따라서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러한 두 덩치의 온순한 모습들이 결코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예리엘의 의아한 시선이 호퍼와 잭슨을 살피다 아이딘에게로 옮겨졌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뭐가 그리 좋은지 쉴 새 없이 두 덩치에게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예리엘로서는 그들 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두 덩치가 말썽을 부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큰 걱정 덜기로 했다.

아이딘이 이곳에 온 지 오늘로 나흘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예리엘은 아이딘이 무척 가깝게 느껴진다. 아이딘 그는 알면 알수록 묘한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 * *

아이딘은 오늘 새로 생긴 친구 둘과 함께 시장으로 향했다. 예리엘이 부탁한 보릿자루-아마 비스킷을 만들기 위한-와 때마침 떨어진 몇몇 식료품을 사기 위해서다.

예리엘은 왜 이렇게 빨리 식료품이 떨어졌는지 정말 모르겠다고 하지만 아이딘은 예리엘이 그 사실을 정말 몰라서 자신한테 그러는 것인지 가게를 벗어날 때까지도 명확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이 많을 거 같은데…….”

아이딘은 시장을 향해 가는 길이 생소하긴 했지만 마을의 이곳저곳을 볼 수 있어 나름 좋았다. 그리고 함께하는 동행이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조금 전 예리엘이 아이딘에게 시장에 다녀오라고 하자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잭슨과 호퍼가 나섰다.

“우리랑 같이 가는 게 어때?”

“이곳 시장은 우리가 꽉 잡고 있으니까, 헤헤…….”

“나 혼자 가도 되는데.”

아이딘이 괜히 한 번 튕겨 본다.

“에이,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말이 권유지, 두 덩치가 막무가내로 같이 가자고 고집을 부렸다. 손에 익지 않은 가게의 허드렛일보다는 바람도 쐴 겸 시장에 갔다 오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 듯싶다. 그러나 그런 덩치의 어설픈 잔꾀보다는 아직도 두 덩치 녀석에게 못 믿겠다는 듯한 경계의 눈빛을 보이는 예리엘을 피하는 게 급선무였다. 저 두 덩치를 놔두고 갔다가는 예리엘과 또 무슨 말썽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세 사람은 도시 외곽을 지나 근 한 시간 이상을 걸어서 시장 골목에 들어섰다. 대재앙 이후 석유를 이용한 이동수단의 퇴보로 인해 수 킬로미터의 거리는 통상적으로 도보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호기심 많은 아이딘이 이것저것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가게를 벗어나 밖으로 나온 아이딘은 신이 났지만 그 뒤를 따르는 두 덩치는 이미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 따라오는 건데 하면서 아이딘을 의식하여 조용조용히 투덜거린다.

시장은 며칠간 비가 내린 이후라 그런지 여느 때보다 더욱 시끌벅적했다. 여기저기서 호객 행위를 하는 장사꾼의 열띤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과 흥정하는 손님의 목소리도 들렸다. 엄마에게 군것질거리를 사 달라고 떼쓰는 아이의 투정도 들려왔다. 폐허 속에도 사람 냄새가 깊이 풍겨나는 시장터였다.

그런데 아이딘 일행이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의식한 아이딘은 동행과의 거리를 조금 더 벌렸다. 험상궂은 그 두 녀석 때문에 주목을 받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사람들은 낯선 아이딘의 아름다운 외모에 시선을 빼앗긴 것이다. 아이딘은 어딜 가도 눈에 띌 만큼 아름다운 얼굴과 균형 잡힌 몸매, 불타는 듯한 빨간 머리까지, 말 그대로 조각 같은 외모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동작 하나하나, 걸음걸이 하나하나에 왠지 모를 기품이 느껴졌다. 왠지 서민적이고 투박한 시장통과는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남녀 불문하고 아이딘에게 시선이 꽂히는 건 당연했다. 대재앙, 그리고 첫 번째 전쟁, 내전에 또다시 시작된 루체 왕국과의 전쟁. 아무리 후방이라지만 갈수록 황폐해져 볼품없어지는 생활 속에 그와 같은 아름다움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이딘은 아직까지 그런 사실에 대해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잭슨과 호퍼는 평소에 그들이 자주 이용하는 곡물가게로 아이딘을 데려가는 중이었다. 이제 모퉁이만 돌아서면 목적지에 다다를 것이다. 한데, 작은 사건이 벌어졌다.

“어이, 아가씨. 시간 좀 있나?”

시장의 초입에서부터 아이딘을 눈여겨보던 청년이 달라붙은 것이다. 아이딘은 무시하고 그를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청년이 아이딘의 어깨를 다짜고짜 잡아끌었다.

“뭐가 그렇게 바빠? 대화 좀 하자고.”

아이딘이 청년을 돌아보는 그 순간. 그보다도 먼저 거대한 손이 청년의 머리 위에 얹혀졌다.

잭슨이었다.

덥석.

이번엔 검은 손이 청년의 목을 비틀어 쥐었다.

호퍼였다.

잭슨과 호퍼가 험상궂은 인상을 짓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급격히 거리를 벌려 섰다. 아마 또 시작이다 하는 분위기다.

머리와 목을 잡힌 청년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너, 감히 내 친구한테 무슨 개수작이야! 엉?”

“이 바닥에 네놈 무덤 자리 하나 봐 줄까?”

“아주 확 눈알을 뽑아 버려!”

잭슨과 호퍼가 매서운 협박을 연달아 날렸다. 청년은 두 덩치의 연이은 협공에 거의 혼절할 듯이 놀라 전신을 바들바들 떨어 댔다. 주변에서 이를 구경하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방금 쟤들이 저 빨간 머리보고 친구라 그런 건가?”

“저거 노만 마을의 건달들 아니야?”

“저 곱상하게 생긴 친구가 개망나니 잭슨의 친구라고?”

결국 완전히 이목을 집중시키고 말았다. 아이딘이 재빨리 사태를 수습한다.

“호퍼, 잭슨.”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동시에 두 덩치가 아이딘을 쳐다본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없이 얌전히 청년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는다.

“괜히 소동 일으키지 말고 가던 길이나 가자, 알았지?”

“엉…… 알았어!”

대답과 동시에 잭슨과 호퍼는 넋이 빠져 땅에 주저앉은 청년에게 경고의 헛주먹질을 한 번 날린 채 가는 걸음을 계속했다.

잭슨과 호퍼를 알아본 몇몇 시장 사람들은 그들이 아이딘의 말 한마디로 군말 없이 조용히 따라가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느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개망나니 두 녀석을 마치 어린양처럼 다루다니. 이전 잭슨과 호퍼에게 심하게 당했던 기억을 되살린 몇몇 사람들은 못내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었다.

넋이 빠진 청년을 뒤로한 채 세 사람은 길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감춰 버렸다.

그제야 아이딘에게 수작을 걸던 청년은 온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이런…….”

바지가 축축해져 있었다. 자칫하면 저 덩치 녀석들에게 죽을 뻔했다가 살아났다는 안도감에 자기도 모르게 긴장이 풀린 것이다. 청년의 나이 올해로 스물일곱. 다섯 살 때 이후 처음으로 바지에 오줌을 지렸다.

* * *

아이딘과 양 어깨에 물건이 가득 든 묵직한 배낭을 짊어진 두 덩치는 열심히 귀가하는 중이었다. 이들은 오는 내내 수다 삼매경에 빠져 신이 났다. 마치 오래된 친구들과 같이 의기투합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시장을 벗어나 폐허가 된 도시지역을 지나가려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다. 잔잔히 불어오던 산들바람이 거칠게 몸부림치며 하늘의 구름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이를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아이딘이었다. 예민한 그의 감각이 무엇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아이딘이 돌연 걸음을 멈추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상한데.”

“왜 그래?”

잭슨이 물었다.

“뭔가 이상한데. 저기를 봐. 저쪽에 모래 바람 같은 것이 올라오잖아. 그리고 뭔가 이상한 느낌이야.”

아이딘이 초원 저편을 가리켰다.

그제야 잭슨과 호퍼도 심상찮은 무언가를 느꼈다. 두 사람이 동시에 허리춤에 차고 있던 시계 같은 물건을 바라보았다. 작고 둥근 액정이 녹색에서 붉은색을 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고개가 위로 들어 올려졌다. 그리고 보았다. 폐허 저편으로 가득한 뿌연 기운을…….

“제…… 젠장, 플레이그 스톰(Plague Storm)이다! 피하자구, 어서!”

“얼른 뛰어, 안 그러면 큰일 나!”

잭슨과 호퍼가 잽싸게 앞으로 내달렸다. 아이딘도 그들과 함께 얼떨결에 내달렸다. 두 덩치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사력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그들이 원래 서 있던 곳에서 근 1킬로미터를 한달음에 달려 시가지에 다다랐을 때쯤.

콰카카카카카카!

하늘에서 지면으로 뿌연 모래 바람이 밀려왔다. 바람은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거셌다.

호퍼와 잭슨이 휘청하는 순간 아이딘이 재빨리 손을 내어 잭슨의 손을 잡는다. 잭슨 역시 호퍼의 손을 잡아 무게중심을 잡는다. 주변 사람들이 바람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 또는 건물에 몸을 부딪친다. 아이딘이 기둥 하나를 잡아 몸을 끌어 두 덩치와 가까스로 건물 안으로 들어선다. 그제야 잭슨과 호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람이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그런 폭풍은 아니었다. 건물을 날려 버릴 만큼 어마어마한 파괴력도 아니었다. 게다가 폭풍이라고 하기에 무색할 정도로 그리 오래 지속되지도 않았다. 두 덩치와 아이딘이 건물 안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짧은 순간에 순간 모래 폭풍이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강성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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