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e-sports

아르고-황금의 어스듐 26화

center
[데일리게임]
테이슨은 크게 언성을 높였다가 두 주먹을 꾹 쥐고 돌아섰다. 그리고 깊이깊이 심호흡을 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더니 테이슨이 한층 진정된 목소리로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잘못 본 모양이다.”

“……!”

실망감이 가득 묻어 나오는 테이슨의 태도에 천하의 티노도 말문이 막혔다.

“영리한 아이라 생각했다. 대범하고 믿을 수 있는 아이라 생각했어.”

“…….”

“자신의 수준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공을 세울 욕심에 앞뒤 분간 못 하는 녀석이라곤 생각 못 했다.”

테이슨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타당한 말이었지만 듣기 껄끄럽다 못해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티노로서는 자신의 실력은 물론 모든 상황을 누구보다도 객관적으로 파악해서 저지른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테이슨의 신뢰를 되찾고자 그걸 고스란히 털어놓을 순 없었다. 티노가 찾고 있는 은인일지도 모르는 테이슨에게 그런 식으로 보이는 건 괴롭지만 말이다.

“하아…….”

무거운 한숨을 깊이 토해 낸 테이슨은 티노를 돌아봤다.

“시문 님의 공방을 조사하는 건 이제 그만해라.”

“예?”

생각지 못한 말에 티노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테이슨을 올려다봤다. 테이슨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고 그의 눈엔 지금껏 그에게선 찾아보기 힘들었던 엄격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더는 널 믿고 일을 맡길 수 없다.”

“…….”

“그리고 믿을 수 없는 너를 사관학교에 추천할 수도 없다.”

티노의 속은 몹시 복잡했지만 반발의 여지도 없이 딱 자르는 테이슨의 태도에 그저 입을 굳게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사관학교를 깨끗이 단념하고 다른 길을 모색하던 티노에게 달콤한 제안을 한 것은 테이슨 쪽이었다. 그 덕분에 갑자기 순조로워진 미래를 계산하면서 조금은 유치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좋아했었다. 어차피 한 번 단념했던 길이라 해서 두 번 단념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크게 기대했던 만큼 처음보다 더 큰 상실감이 들었다.

‘하지만…….’

티노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알겠어요. 실망시켜 죄송합니다.”

이 대가가 티노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아르카를 살린 값이라 생각하면 싸게 먹힌 거다. 그리 생각하자 상실감이나 실망감은 깨끗이 사라졌다.

티노는 침대에서 내려와 상의를 벗었다. 드러난 티노의 몸은 온통 흉터투성이였다. 그중엔 당시 꽤 심각했을 법한 것들도 많았다. 테이슨은 그것을 놀란 눈으로 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은 티노는 그 외의 소지품을 챙기기 시작했다. 조끼를 걸친 뒤 협탁 위에 놓여 있는 소지품을 곳곳의 주머니에 넣었고, 허리띠를 매고 작은 가죽 주머니를 걸고 총과 단검을 챙겼다. 백팩을 등에 메고 마지막으로 고글을 꼈다.

생각보다 반응이 약해서인지 테이슨은 조금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실망감은 사라졌어도 그에게 넉살을 떨 기분까지는 아니었다.

“전 그만 가 볼게요. 벌써 날이 밝았네요.”

티노가 환한 창밖을 흘낏 본 뒤 꾸벅 인사하자 테이슨이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미리 알고 가는 게 좋겠지. 아마 지금쯤 공방에선 소란이 벌어졌을 거다.”

“……?”

어제 씨드가 끊겼을 때 공방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무기 제작 공방도 아니고 원석 가공 공방의 씨드가 끊겨 봤자 세척기의 시약을 다시 데워야 하는 수준의 피해밖에…….

“어젯밤 친위대에서 시문 님의 공방을 수색했다.”

“예?!”

“개인적으론 대단히 경솔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만, 왕성이 휘말리면서 조급해하는 녀석들이 생겼어. 게다가 어젯밤 내가 한 말을 엘리가 들어 버렸거든.”

“늦었나, 라고 말했던 거요?”

“너도 들었구나?”

테이슨은 의외라는 듯이 티노를 보았다.

그 말을 티노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어젯밤 그가 테이슨과 엘리의 일거수일투족에 온 신경을 쏟아 부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제 테이슨이 그 말을 했을 때 티노는 바로 엘리의 반응을 확인했었다. 그때는 분명 못 들은 것 같았는데……. 하기야 흘려들었다가 상황이 진정되자 떠올렸을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우리가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한 거라고 해야 정확하겠지. 공연히 우리 패만 보인 꼴이 되어 버렸어.”

당연히 그랬을 것이라 예상하긴 했었다. 시문이 정말 무언가 켕기는 짓을 하고 있었다면 그것을 쉽게 들통 나도록 두진 않았을 것이다. 그 정도 머리는 있을 테니까. 왕성의 씨드가 끊긴 것에 당황하여 무작정 덮친 친위대의 수색망에 걸릴 정도라면 몇 년 동안 암약하진 못했겠지.

“네가 시문 님을 조사하고 있었다는 건 알려지지 않았으니 네가 곤란해지는 일은 없을 거다.”

“예…….”

티노는 문 쪽으로 돌아서려다 테이슨에게 말했다.

“이제 시문 님 뵈러 오기 더 힘들어지셨겠네요. 속이 복잡하시겠어요.”

“각오했던 일이다.”

하긴 어제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터졌을 일이니까. 티노는 고개를 끄떡이곤 돌아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고리를 비틀어 여는데 테이슨이 막 생각났다는 어조로 물어 왔다.

“그러고 보니 허리띠의 주머니가 열려 있더구나. 아무것도 없던데…….”

“예?”

그 말에 티노는 허리띠에 달린 작은 가죽 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테이슨이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남들 눈에는)경솔한 행동을 한 티노에게 화가 났을 뿐 본성은 역시나 다정한 사람이었다.

“혹시 어제 소동 속에서 흘린 거라면 찾아 주마.”

“……아니요. 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별거 아니었으니까요.”

티노는 가죽 주머니를 한 손으로 툭 치며 건성으로 답했다. 테이슨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그는 보지 못했지만 티노는 그 순간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아르카의 탈출을 계획하면서 티노는 생각할 수 있는 많은 경우의 수를 떠올리며 대비했었다. 그중 하나가 아르카가 탈출하는 순간에 자신의 의식이 없을 경우였다. 설령 의식이 있더라도 대외적 시선을 생각하여 아르카와 대화 등을 못 할 경우도 생각했다.

탈출에 성공하더라도 아르카가 개인적으로 티노에게 연락을 취해 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에겐 그만의 목적이 있을 것이고, 그 목적을 위해 티노의 조력 등이 필요하지 않는 한 결코 아는 척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것이 둘의 약속이니까.

그래서 티노는 아르카의 목걸이를 아르카가 자신의 손으로 직접 넣어 둔 가죽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어떤 상황이 되든 둘의 친분이 드러나지 않고 아르카가 자신의 목걸이를 되찾아 갈 수 있도록 말이다. 티노는 그런 자신의 생각을 아르카가 읽어 내리란 걸 알고 있었다.

가죽 주머니에 넣어 둔 것은 목걸이뿐만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고문을 당했을 그를 위해 준비한 상급 약이 함께 있었다. 즉시 대부분의 부상을 낫게 하는 최상급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코어 캡슐을 팔아서 번 돈을 전부 털어서 구입한 약이었다.

그의 의도를 보다 뚜렷이 드러내기 위해서 주머니 안의 다른 물건은 다 빼내고 목걸이와 약병만 넣어 놨었다. 그리고 그 배려에 대한 보답은 텅 빈 주머니로 받았다. 이것 이상 가는 보답은 없다.

흐뭇하고도 뿌듯한 마음으로 공방으로 돌아와 언제나 그랬듯이 무방비한 문을 열려는데 웬일로 잠겨 있었다. 방문자용이라면 몰라도 직원용 뒷문은 항상 열려 있었는데 말이다.

“……?”

의아해하다가 곧 상황을 짐작했다. 아무리 무방비하고 허술한 공방이라 해도 친위대가 몰려와 잔뜩 들쑤시고 갔는데 예전과 똑같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별수 없이 앞으로 가 방문자용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누군지 묻지도 않고 벌컥벌컥 잘도 열어 대던 문 너머로 라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느 때와는 달리 다소 날이 서 있는 목소리였다.

“나야, 티노.”

“…….”

어쩐지 싸늘하게 느껴지는 침묵이 깔리더니 철컹 하고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낯빛이 안 좋은 라디가 티노를 빤히 바라봤다. 전혀 우호적이지 않은 그 시선이 티노는 의아하기만 했다. 친위대가 수색하다가 아무것도 못 건지고 돌아갔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라디가 티노에게 저런 태도를 보일 이유는 없었다. 테이슨은 티노가 한 일이 드러나진 않았다고 했다. 만약 들켰다면 저런 식으로 조용히 티노를 맞을 리 없으니까 테이슨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니 더더욱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어디 갔다 오는 거야?”

“병원에 잠깐 신세 지다가 오는 길이야.”

“병원은 왜?”

라디는 여전히 문틈에서 비켜서지 않은 채로 추궁조로 티노를 대했다. 티노는 슬쩍 눈살을 찌푸리며 다소 강하게 나갔다.

“뭐야? 말투가 이상하다?”

“병원은 왜 갔냐니까?!”

아예 언성을 높이는 라디를 황당하게 보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이 자식! 어디서 뻔뻔하게 낯짝을 들이대?!”

“……?”

열린 문틈에 서 있던 라디를 옆으로 밀치며 버럭 소리 지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웨이였다. 제 세상을 만난 양 그 어느 때보다 활기 있어 보이는 그는 잔뜩 얼굴을 붉힌 채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티노가 눈만 껌벅이는데 힐이 다가와 웨이의 어깨를 지그시 잡고 눌렀다. 그리고 티노를 보며 말했다.

“우선 들어와라. 들어와서 말하자.”

“저 망할 자식을 왜 들입니까?! 이대로 쫓아내자고요!”

“일에는 순서가 있어. 티노의 말을 들어 봐야지.”

그리곤 티노에게 말했다.

“들어와라.”

“…….”

들어가고 싶어도 웨이가 떡하니 문 앞에서 비키지 않고 있었다. 힐이 혀를 차며 웨이를 끌어당겼다.

“쫓아내든 넘어가든 그건 시문 님이 결정할 일이야.”

“……칫!”

시문의 이름까지 거론되자 웨이도 별수 없다는 듯 몸을 홱 돌리더니 쿵쿵 소리 내 가며 안으로 들어갔다. 힐은 석연치 않다는 얼굴로 티노를 흘낏 보았다.

“따라와라.”

그리곤 웨이의 뒤를 따라갔다. 방향을 보니 식당 쪽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웨이에게 밀쳐졌던 라디가 문 옆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껄끄러운 눈으로 티노를 빤히 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

티노가 물었으나 라디는 이제는 질문조차 하지 않으려는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티노는 어깨를 으쓱이곤 식당으로 향했다.

한창 일을 하고 있어야 할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모든 직원들이 식당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티노가 들어오자 웅성거리며 우호적이지 않은 시선을 보내 왔다. 의심과 혼란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는 시선을 보며 티노는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티노가 테이슨의 제안으로 공방을, 정확히는 시문을 조사하고 있었다는 것은 티노와 테이슨 둘만의 비밀이다. 테이슨이 입방정만 떨지 않았다면 티노가 한 일이 들킬 이유가 없다. 그리고 좀 전에 테이슨이 티노의 일이 저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고 확언해 주기까지 했다. 테이슨과의 일이 아니라면 공방 사람들 앞에서 티노가 떳떳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저들이 티노를 고까운 눈으로 볼 이유도 없고.

“저것 봐요! 저 뻔뻔한 자식이 낯빛 하나 안 바꾸고 시치미를 떼고 있잖아요! 말할 가치가 없다니까요?!”

웨이는 화가 난 건지, 흥분한 건지, 신난 건지 알 수 없는 태도로 티노를 손가락질했다.

“가만히 좀 있어 봐.”

힐이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미간을 문질렀다. 그리고 티노에게 물었다.

“티노, 어젯밤 어디에 있었지?”

“병원에요.”

“숙소에 있던 녀석이 왜 갑자기 병원에 간 거냐? 그것도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고?”

“처음부터 병원을 갈 예정은 아니었어요. 습격을 당해서 잠깐 기절했거든요. 깨 보니 아침이었어요.”

그때 웨이가 펄쩍 뛰었다.

“네놈이 뭔데 만날 습격을 당해? 기껏해야 수습 기술자인 놈이!”

힐난조로 말은 하지만 꼭 질투하는 것처럼 들렸다. 번번이 사건사고에 휘말리는 것이 그리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닌데도 말이다.

힐은 현명하게도 웨이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물었다.

“그럼 처음부터 갈 예정이었던 곳은 어딘데?”

“감옥이요. 플로레스라가 갇혀 있는.”

티노는 적당히 속여 넘기기 위해 적당히 사실을 섞어 말하기로 했다. 그의 말이 의외였던지라 식당 안이 술렁거렸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웨이는 분하다는 듯이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가 뭐라 끼어들기 전에 힐이 먼저 손을 들어 막았다.

“네가 거길 왜 가?”

신승림 작가
<Copyright ⓒ Dailygame co, Lt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골프/연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