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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역사위원회]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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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역사위원회 표지
[데일리게임] 10화
앤지(1)

“여기 자주 오시나 봐요?”
그녀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
“네, 별일 없으면 거의 매일 옵니다. 이 집 커피 맛이 근처에서 제일 좋거든요.”
이슬휘는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가슴의 울림도 비교적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빨개졌던 얼굴도 원래 색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렇군요……. 근데 뭐 하시는 분인데 매일 오시나요? 결혼도 안 하셨나요?”
“아, 전……. 역사학도입니다. 대학원에 다니고 있고요.”
이슬휘는 그다음 말을 힘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그리고 전 미혼입니다.”
자기의 머릿속에 결혼의 기억이 없으니 분명 미혼일 터였다.
“네에, 그러시군요. 저도 미혼입니다만……. 하하.”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그녀는 찻집 안에 다 들릴 정도로 크게 웃었다.
“참 재미있는 분 같아요.”
‘내가?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이슬휘는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 보는 터라, 대꾸할 말이 없어 그저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기 웃음소리에 놀란 듯 입을 가리며 주위를 살폈다. 이슬휘도 같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찻집 안에는 몇 사람 있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녀의 웃음소리에, 그들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근데 이름은 어떻게 되시나요?”
“아, 저는 이슬휘라고 합니다. 푸른 구슬 슬 자에 빛날 휘 자 쓰는…….”
“네, 이슬휘 씨. 별로 흔하지 않은 이름이군요.”
“하하, 제가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이름입니다.”
그녀는 확실히 민자영이 아니었다. 다만 비슷하게 닮았을 뿐, 민자영은 아니었다. 그리고 뭐랄까, 민자영의 밝음에는 그늘이 있었지만 그녀의 밝음에는 그늘이 끼어들 틈이 없어 보였다.
“근데, 저……. 저는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이슬휘는 그녀의 눈치를 보며 어렵게 물었다.
“네? 아, 제 이름요?”
“네, 이름.”
“롤링스톤즈 좋아하세요?”
그녀가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네? 그, 영국 밴드요?”
“네. 그 사람들 노래 중에 앤지라고 있는데 아시나요?”
“아, 네. 들어본 것 같습니다.”
“그게 제 이름이에요, 앤지.”
“아, 네. 앤지.”
‘앤지, 앤지.’
이 나라에서는 너무 낯선 이름이었다.
‘혹시……?’
“교포세요?”
그녀는 이슬휘의 물음에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를 한 번 쳐다보고 엉뚱한 말을 했다.
“저는요, 믹 재거가 그렇게 애절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면 도저히 떠날 수 없을 것 같아요. 아니, 믹 재거 아니라 누구라도요.”
앤지의 대답에 이슬휘는 뜨악해졌다.
‘이건 뭐…….’

***

앤지와 처음 이야기를 나누던 날, 이슬휘는 그녀를 만남으로 해서 조용하고 평화로웠던 자기의 삶에 큰 변화가 생길 것 같은 달콤하면서도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첫 만남 이후 그들은 매일 찻집에서 만났다. 만나면 거의 대부분 앤지가 이야기를 했고 이슬휘는 질문에 대답하거나 이야기 중간에 추임새를 넣는 정도만 말했다.
예전처럼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던 평화는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앤지의 이야기를 듣는 게 싫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좋았다.
만약 누군가가 예전의 그 고독한 평화와 현재의 즐거운 피곤함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이슬휘는 당연히 현재를 선택할 것이었다.
사람이 사람과 만나 아무 부담이나 목적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그 이야기에 빠져들고, 서로 공감하며 공통점을 찾아가는 과정.
이슬휘는 앤지와 그런 과정을 겪으며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의 즐거움을 깨달았다.
“근데 이슬휘 씨는 왜 꼭 이 자리에 앉으세요?”
그들은 두 번째 만날 때부터 따로였던 테이블을 합쳐 하나로 만들고 같이 앉았다. 자리에 앉자 앤지가 물었다.
“아, 네. 전 늘 혼자여서 1인 테이블이면 족한데, 이 자리는 별로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자리라 제가 좀 오래 차지하고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게다가 여기서는 밖에 지나다니는 사람들 구경하기도 좋고요.”
“어머, 사람 구경하는 거 좋아하세요? 저도 그래서 이 자리 좋아했던 건데.”
“아, 그러세요? 우리, 공통점이 있네요.”
그것이 이슬휘가 그녀에게서 발견한 자기와의 첫 공통점이었다.

***

앤지와 매일 만나던 그 며칠은 이슬휘가 지구에서 처음 느껴 보는 즐겁고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채 일주일도 가지 않았다.
나흘째인가 닷새째 되던 날, 찻집에 갔더니 앤지가 먼저 와 있다가 반갑게 이슬휘를 맞아 주었다.
그들은 평소처럼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어딘지 분위기가 다른 날 같지 않았다.
헤어질 시간이 되자 앤지가 이슬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저 당분간 여기 못 올 거예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목소리에서 살짝 떨림이 느껴졌다.
좋지 않은 징조다.
“왜요? 어디 가시나요?”
이슬휘의 목소리는 노골적으로 떨려 나왔다. 이슬휘는 급히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앤지가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놀만큼 놀았으니 또 일하러 가야죠.”
“일? 무슨 일 하시는데요?”
그러고 보니 이슬휘는 그녀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어허, 숙녀에게 그런 실례되는 질문을.”
“아, 죄송합니다.”
근데 그게 숙녀에게 실례되는 질문이었던가?
“하하,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아, 네.”
궁금하지만 그녀가 말하지 않겠다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참, 앞으로도 계속 여기 와서 커피 드실 거죠?”
“네, 물론이죠.”
“그럼 우리 자리 잘 지키고 계세요. 제가 언제 또 불쑥 우리 자리 잘 있나 보러 올 테니까요.”
“넵! 확실하게 지키겠습니다. 근데 가시면……. 혹시 연락은 할 수 없을까요? 전화나 메일이나…….”
“음……. 그냥 이렇게 헤어졌다가 다음에 반갑게 다시 만나는 걸로 하지요.”
그녀는 이슬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게 말하며 살짝 윙크까지 했다. 그 표정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이슬휘의 마음은 더 아팠다.

***

앤지가 떠난 후에도 이슬휘는 일과를 마치면 찻집에 가서 홀로 앉아 커피를 마셨다.
이슬휘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녀를 생각했다. 그녀가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혼자 웃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 그가 그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앤지라는 이름밖에는 하나도 없었다. 어쩌면 그 이름도 진짜가 아닐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앤지, 그녀는 누구일까? 어디 살고 무얼 하는 사람일까?
그녀가 했던 이야기들을 통해 그녀의 정체를 유추해 보려고 시도했지만 도무지 뒤죽박죽, 알 수가 없었다.
다음에 만나면 꼭 알아내리라. 그녀는 나에 대해서 다 알고 있지 않나…….
이슬휘는 갑자기 생각을 멈추었다. 사실 그녀가 자기에 대해 알고 있는 내용들도 자기의 실체는 아니었다.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자기의 가면이 아니던가.
혹시 그녀도 나처럼 밝힐 수 없는 비밀이 있는 걸까?
이슬휘는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그리고 그걸 알아볼 기회조차 없다는 사실에 또 슬펐다.
이슬휘는 그녀를 통해 관계의 즐거움을 알았듯이 이제는 그녀를 통해 관계의 단절로 인한 아픔을 알아 가고 있었다.
여태까지 슬휘는 항상 떠나는 사람의 입장이었다. 역사 속으로 갔다가 일을 마치면 그들을 떠나왔다.
그런데 지금 처음으로, 자기는 그대로 있고 누군가가 자기를 떠나가는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떠나는 자와 남겨진 자.
헤어진다는 것은 두 사람에게 동일한 현상이지만 느낌이나 의미는 천지차이였다.
남겨진 자에게는 떠난 자의 빈자리가 그렇게 크게 보일 수 없는 것이다.
이슬휘는 그녀가 남기고 간 빈자리가 그녀와의 추억으로 채워지기를 바랐다. 매일 커피를 마시며 그녀와 함께한 날들의 사소한 한 조각까지 추억 속에 담으려고 애썼다.
이슬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추억으로 빈자리를 채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시간이란 게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처가 아물듯 빈자리가 점점 작아졌고 작아진 빈자리는 추억으로도 충분히 채울 수 있게 되었다.
이슬휘는 그렇게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는 계속 기다렸다. 전에는 올지 안 올지도 모른 채 기다렸지만 이제는 그녀가 다시 올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녀가 온다고 했으니, 틀림없이 올 것이었다.
이슬휘는 그때까지 찻집의 그들의 자리를 잘 지키면서 기다리기만 하면 될 터였다.

***

민자영을 만난 후 이슬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삶과 마음을 알아보려고 했고 이해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휘는 제3자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과 자기는 별개인 것이다.
그들은 그들대로 인생이 있고 역사가 있고, 이슬휘에게는 자기의 인생이 있고 임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앤지를 만나고 나서 그 경계가 조금씩 허물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역사 속에서든 현실에서든 사람들이 즐거워하면 같이 웃었고 사람들이 괴로워하면 같이 울었다.
이슬휘는 더 이상 사람들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공감하게 된 것이다.
그건 그의 임무에 있어 치명적인 위험 요소였다. 버그의 대상과 감정을 공유하게 되면 버그 제거에 어려움이 있을 게 뻔했다. 민자영의 경우에서도 경험한 바가 아니던가.
하지만 어쩌랴. 이미 그의 마음은 자기 의지로 방향을 틀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강물이 되어 흘러가고 있는 것을.
이슬휘는 임무를 수행할 때 위원회에 들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또 역사에 변화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당사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일을 마무리했다.
예를 들면, 언젠가 만날 인연이라면 일찍 만나 사랑을 이루게 해 준다든지, 평생 고생만 하다 죽는 사람에겐 말년에 약간의 평안을 준다든지 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아카식레코드에서도 거의 변화를 찾아낼 수 없을 만큼 사소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그 사소함의 무게가 전 우주와 맞먹을 수도 있었다.
이슬휘는 그런 식으로 또 한 건의 버그를 제거하고 돌아와 찻집에서 평화를 즐겼다.
이젠 앤지가 없는 고독한 평화도 견딜 만했다.
이슬휘는 커피의 산미를 좀 더 느끼려고 눈을 감고 커피를 입안에서 굴렸다. 신맛이 입안 골고루 퍼지며 침샘을 자극했다.
이슬휘는 커피를 삼켰다. 절로 기분이 좋아지며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어이구, 이젠 혼자서도 잘 노시네요. 앗! 잘 논다는 말은 실례, 죄송합니다.”
이슬휘는 얼른 눈을 떴다. 앤지였다.
거짓말처럼 앤지가 자기를 내려다보면서 웃고 있었다.
이게 몇 달 만인가.
이슬휘는 놀랍고 반가워 말도 할 수 없었다. 앤지가 커피 잔을 들고 이슬휘의 앞에 앉았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시간이 좀 많이 흘렀죠?”
이슬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네, 전 잘 지냈습니다. 앤지 씨도 잘 지내셨나요? 일은 잘 하고 오신 건가요?”
“네, 잘 끝내고 왔지요. 오면서 혹시 찻집이 없어지지나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그대로라 다행이네요. 이슬휘 씨도 그대로 계시고. 하하”
“제가 없어지지 않게 잘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이구, 수고하셨습니다. 제가 뭐 상이라도 드려야 하나요?”
“상? 상 주실래요?”
이슬휘는 머릿속에 반짝 떠오르는 게 있어 그렇게 물었다. 앤지가 웃으며 말했다.
“뭐 받고 싶은 상이라도 있어요? 혹시 음흉한 거?”
이슬휘는 손을 크게 휘저으며 절대 아니라고 부정했다.
“제가 받고 싶은 상은요, 앤지 씨에 대한 이야기예요.”
“겨우 내 이야기?”
“겨우라뇨? 앤지 씨 없는 동안에 제일 후회한 게 그거였는데…….”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제 이야기 해 드릴 테니 재미없다고 졸면 안 돼요.”
“물론이죠. 정신 똑바로 차리고 통째로 암기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알겠어요. 그럼 내일부터 시리즈로 풀어 나가겠습니다. 기대하시라.”
앤지는 언제나처럼 구김 없는 표정으로 활짝 웃었다.

나비의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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