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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역사위원회] 9화

행성역사위원회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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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게임] 9화
동해의 용(3)

이미 대광의 몸 구석구석까지 독이 퍼져 있었다.
이슬휘가 가진 현대 의학 지식을 아무리 동원한다고 해도 대광을 살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대광은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걸 대왕께 전해드리면 당신에게 아주 큰 상을 내리실 것이오.”
대광은 마지막 순간까지 몇 번이나 죽통을 제대로 전달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슬휘는 끝까지 그를 안심시켜 주었고 다행히 그는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이슬휘는 그를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 묻어 주었다.
이슬휘는 마차에서 말을 분리한 후 말을 타고 경주를 향해 달려갔다.
***
대광에게서 받은 옥 노리개 조각을 전해 주자 잠시 후 시종이 나와 이슬휘를 인도했다.
궁궐 깊숙한 곳에 있는 방 안에서 문무왕이 이슬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귀공자 타입의 준수한 중년의 모습이었다. 그의 맑은 두 눈에는 지혜가 가득했고 표정에는 진실함이 차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과 따뜻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문무’라는 시호가 참으로 꼭 맞는 이름이 아닌가 싶었다.
“대해인 천황께서 보내신 사신인가? 어서 이리로 오시게.”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이슬휘를 맞이했다.
이슬휘는 문무왕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고 탁자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보따리에서 대통을 꺼내 문무왕에게 내밀었다.
문무왕은 대통의 밀랍을 깨고 뚜껑을 열었다. 문무왕은 빠른 손놀림으로 대통 안의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이슬휘는 그 편지를 읽지는 않았지만 내용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천무천황이 문무왕에게 왜로 건너오라고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왜로 건너오면 천황의 자리를 물려줄 터이니 신라와 왜를 하나의 나라로 통일하고, 또한 옛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여 당에 맞서는 제국을 건설하라는 것이었다.
자기는 이미 기운이 쇠하여 그 큰 뜻을 이루기에 시간이 부족하니 부디 문무왕이 와서 대업을 이루어 주기 바란다는 간곡한 부탁도 들어 있었다.
편지를 다 읽은 문무왕은 말없이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이슬휘는 그런 문무왕을 또 말없이 쳐다보며 그가 눈을 뜨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문무왕이 눈을 떴다. 그가 이슬휘를 보며 물었다.
“그대가 대광인가?”
“그러하옵니다.”
“대해인 천황께서 그대에게 궁금한 걸 물으라 하셨는데……. 지금 대해인 천황의 형편은 어떠신가?”
“즉위하신 후 많은 치적을 쌓으셔서 나라의 형편이 많이 안정되었사옵니다. 다만…….”
“다만?”
“다만 천황께서 연로하신 까닭에 명령 계통이 예전처럼 일사불란하지는 않은 듯하옵니다. 게다가 다음 황위를 노린 황실 내부 갈등 때문에 천황 폐하의 심기가 많이 불편하신 것 같사옵니다.”
문무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무왕도 천무 천황이 자기의 자리를 노리는 왕자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할 터였다.
문무왕이 다시 물었다.
“내가 왜로 건너가면……. 내가 대해인 천황의 뒤를 이어 천황이 될 수 있다고 보는가?”
“물론이옵니다. 현재 왜는 천황 폐하의 노력 덕분에 여태까지 권력을 쥐고 있던 백제계가 세력을 잃고 신라계와 고구려계가 연합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있사옵니다. 그러니 대왕께서 고구려계와 신라계의 세력을 그대로 장악하신다면 천황 위를 이어받는 것은 문제없다고 생각하옵니다.”
“알겠네. 그대는 가서 좀 쉬도록 하시게. 내가 또 부를 터이니 그때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세.”
말을 마친 문무왕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슬휘는 문무왕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
다음 날, 문무왕이 다시 슬휘를 불렀다.
문무왕은 어느 정도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표정이 전날보다 편안해 보였다.
“대해인 천황의 서찰에는 그대가 당을 비롯해 여러 지역을 다녀 식견이 넓다는데, 내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좀 해주시지 않겠소?”
“식견이 넓다는 칭찬은 감당하기 어려우나 여기저기 다니면서 보고들은 바를 말씀 올리도록 하겠사옵니다.”
이슬휘는 먼저 당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현재 당은 토번과 돌궐을 평정해서 어느 때보다 안정된 상태이옵니다. 그러니 조만간 신라를 향해 어떤 식으로든지 압력을 가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소문에 의하면 이치 황제의 건강이 점차 악화되고 있어 수년 내에 변고가 있을 것이라 수군거리고 있사옵니다.”
“그럼 앞으로 정세는 어떻게 될 것 같은가?”
“돌궐의 부흥 운동이 지속되어 결국에는 나라를 세울 것으로 예상되옵니다. 그렇게 되면 당과의 분쟁이 계속될 것이고 당과 돌궐이 서로에게 묶여 있는 형국이 될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옛 고구려 영역은 그들의 관심 밖, 무주공산인 상태가 될 것이옵니다.”
“그렇군, 그렇군.”
“하오나 고구려의 옛 영토를 되찾는 일은 신라만의 힘으로는 불가하옵고 고구려의 세력과 손을 잡아야만 가능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그렇지, 그대의 생각이 내 생각과 같소. 그러므로 내가 왜로 건너가서 대해인 천황과 함께 그 일을 도모할 생각이오. 이번이 아니면 우리에게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오겠소?”
“그러하옵니다. 훌륭하신 생각이옵니다.”
“또 내게 해 줄 이야기는 없소?”
이슬휘는 문무왕에게 다른 세상에 대해 알려 주고 싶었다. 동아시아의 끝에서, 당나라와의 관계만이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말해 주고 싶었다.
“예, 대왕마마. 제가 흉노에 대해 들은 이야기이온데 재미있는 것이 있었사옵니다.”
“그게 무엇이오?”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 년 전에 흉노의 한 무리가 당의 서쪽 변방인 아란에서 더 서쪽으로 가 그쪽 나라들을 복속시키고, 당나라에 버금가는 거대 왕국을 세웠다고 하옵니다.”
“오호, 그런 일이? 흉노라 하면 우리 김 씨와도 같은 핏줄이 아닌가? 그래, 그 부족의 선우는 이름이 뭐요?”
이슬휘는 ‘아틸라’라고 말하려다 잠시 숨을 골랐다. 원래 발음으로 말했다가는 소현 세자처럼 못 알아들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이슬휘는 비슷한 발음의 한자어를 갖다 붙였다.
“아특라라 하옵니다.”
“못 들어 본 이름이구려. 내 그렇잖아도 당에 가서 문물을 보고들을 때 당의 서쪽으로도 수많은 나라와 백성들이 살고 있다는 소릴 들었소. 그런데 그런 일이 있었구려…….”
“그렇사옵니다. 대왕께서도 이번 기회에 그처럼 큰 뜻을 펼쳐 보심이 어떨까 하옵니다.”
“참으로 고맙고도 좋은 이야기요. 내 그대의 그 말을 잊지 않으리다.”
***
“이제 소인은 또 다른 임무를 위해 떠나야 하옵니다. 부디 큰 뜻을 이루소서.”
사흘째 되던 날 아침, 슬휘는 문무왕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돌아와야 할 시간이 되어 가기 때문이었다.
“그렇구려. 잡지는 않을 터이니 이별주나 한잔하고 가시오.”
문무왕은 이슬휘를 다시 안쪽 방으로 안내했다. 그들은 술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나는 왜로 가기로 결심했다오. 일자는 내가 다시 대해인 천황께 사람을 보내 알려 드리도록 하리다.”
이슬휘는 깊이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천황 폐하께서 무척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내 계획을 한 번 들어보시오.”
“예, 말씀하시옵소서.”
“지금 우리 신라는 당에 대항하려면 강력한 왕권이 필요한데 진골 귀족들이 자기네 세력이 약해지는 걸 막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다오. 그래서 나는 왜로 갈 때 내가 죽었다는 공표를 하게 할 생각이오. 내가 죽은 것을 기화로 귀족들이 반란을 도모할 것이 뻔하니 그때를 놓치지 않고 그들의 세력을 꺾어 놓을 생각이오. 물론, 그건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태자가 왕이 되어 할 일이지만.”
“아주 훌륭하신 생각이옵니다.”
“그리고 나는 왜로 가서 대해인 천황과 함께 왜를 장악하고, 고구려의 옛 영토를 수복할 계획을 세울 것이오. 그렇게 되고 나면 우리나라도 당에 버금가는 거대 왕국이 될 것이오. 하여 나는 동해의 용이 될 것이오.”
“부디 뜻을 이루시기를 바라옵나이다.”

이슬휘는 진심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현재로 돌아왔다.
하지만 슬휘는 알고 있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났더라도 자기가 가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고쳐 놓고 와야 하는 것이다.
이슬휘는 다시 아카식레코드와 역사책을 놓고 문무왕 시기를 살펴보았다.
천무천황이 죽은 후 그 황후가 황위에 오르니 이가 지통천황이다. 지통천황은 후에 문무왕에게 양위하는데 일본에서의 이름은 문무천황이다.
문무왕은 신라의 신문왕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는 한편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들을 통합하여 발해를 건국하는 데 도움을 준다.
698년. 발해가 건국됨으로써 문무왕의 큰 뜻이 펼쳐질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신라의 효소왕은 당시 겨우 12살로 문무왕의 뜻에 동참할 상황이 아니었고, 발해의 대조영은 나라의 기틀을 잡느라 또한 문무왕의 뜻에 동참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문무왕의 나이는 이미 일흔을 넘긴 지 수년, 새로운 것을 도모할 나이는 아니었다.
그렇게 하여 연개소문과 문무왕의 큰 뜻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슬휘는 기록을 덮으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큰 뜻을 가진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같이 실패하고 마는가?
특히 이 나라의 역사에서는 그게 더 심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역사다.
더하거나 뺄 수도 없고 고칠 수도 없는 역사, 바로 그것인 것이다. 안타까워도 어쩔 수 없었다.
***
이슬휘는 찻집에 앉아 뜨거운 커피를 홀짝거리며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다시 그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린 지도 며칠이 지났다.
이슬휘는 그녀가 나타났던 날들을 달력에 표시해 봤다. 혹시 특정 요일이나 날짜에만 나타나는 게 아닌지 해서였다.
하지만 그녀가 나타났던 날들은 같은 요일도 아니고 일정한 간격도 아니고, 아무 연관도 없는 불규칙성만 보일 뿐이었다.
그 간격 또한 들쑥날쑥해서 언제쯤 나타날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음, 오늘따라 커피 맛이 좋은데…….
같은 찻집이라 해도 바리스타에 따라, 원두를 볶은 지 얼마냐에 따라 커피 맛에 차이가 있었다.
이 집은 동네에서 탐색해 본 결과 가장 맛있는 집이라 단골로 정해 놓고 오는 것이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커피 맛이 더 좋은 것 같았다.
이슬휘는 도저히 한 잔만으로는 안 될 것 같아 한 잔을 더 시키기 위해 카운터로 갔다.
커피를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무심코 문 쪽을 보다가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그녀였다.
그녀도 이슬휘를 보았다. 그녀는 이슬휘를 알아보고는 바로 눈을 돌려 그의 자리를 확인했다.
이슬휘는 급히 말을 꺼냈다.
“아아, 괜찮습니다. 제가 그 자리 양보하고 다른 자리에 앉아있으니 걱정 마세요.”
자기의 말투가 너무 공손하고 저자세라 스스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가 다시 이슬휘를 쳐다보더니 가볍게 웃었다. 보는 사람 기분을 좋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고맙습니다.”
이슬휘는 그녀의 웃음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인사를 하고 말았다. 고개까지 꾸벅 하면서.
“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닙니다. 말이 헛 나와서 그만……. 그럼 저는 이만…….”
이슬휘는 자기 자리로 돌아와 그녀를 힐끔거리며 커피를 홀짝였다. 잠시 후 그녀가 와서 원래 이슬휘의 자리에 앉았다.
“아, 자리를 이렇게 해 놓으셨군요. 고맙습니다.”
그녀가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고맙죠.”
“네? 아까부터 자꾸 고맙다고 하시는데, 뭐가 고마우신지…….”
“아, 저, 저…….”
에라, 나도 모르겠다.
“제 앞에 나타나 주셔서 고맙다고요…….”
“네?”
그녀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한동안 말없이 이슬휘를 쳐다보았다. 그 표정이 아주 복잡다단했다.
“푸훗.”
마침내 그녀가 참았던 웃음을 토해 냈다.

나비의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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