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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역사위원회] 6화

행성역사위원회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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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게임] 6화
행복한 남자(3)

세자는 아담 샬과의 만남이 기대되는지 상기된 표정으로 나갈 채비를 꾸리고 있었다.
“형님, 저랑 잠깐 이야기 좀 하시지요.”
그 모습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봉림 대군이 세자에게 말했다.
둘은 옆방으로 들어갔지만 말소리는 밖으로 다 들려 나왔다.
“형님, 여진족 오랑캐들과 가까이 지내시는 것도 모자라 근본도 알 수 없는 색목인과도 친교를 맺으려 하십니까?”
화난 봉림 대군의 말소리에 이어 세자의 달래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허, 그게 무슨 말이냐? 나는 우리 조선에 돌아갈 때 하나라도 더 배워 가려고 이러는 게 아니냐?”
“그래 봤자 오랑캐들의 천박한 풍습인데 배우긴 뭘 배웁니까?”
“너는 이들이 어떻게 명을 쓰러뜨렸는지 궁금하지 않느냐? 이들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고 싶지 않느냔 말이다.”
“그거라면 더더욱 배우고 말고 할 것이 뭐 있습니까? 바로 무력, 군의 힘이 아닙니까? 우리도 군사력만 잘 기르면 어찌 이따위 오랑캐 놈들에게 수모를 당하겠습니까?”
“어찌 나라의 힘이 군사력 하나뿐이라 생각하느냐? 그리고 그 군사력이란 것이 그냥 얻어지는 것이더냐? 군졸에, 무기에, 장비들, 그리고 군량미까지……. 그 모든 것을 백성들이 충당하여야 할 터인데, 결국 군사력을 기른다는 말은 백성들을 잘 먹고 잘 살게, 삶에 여유가 있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더냐?”
“좋습니다. 형님 말씀이 옳다고 하십시다. 그런데 그걸 왜 여기서 찾으시냔 말입니다. 이 오랑캐 땅에서…….”
세자는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말을 멈추었던 봉림 대군이 다시 불쑥 내뱉었다.
“형님이 그리하시니 아바마마께서 사람을 보내 형님을 감시하는 게 아닙니까.”
“그만두어라.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세자는 문을 박차고 나왔다. 문밖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머쓱한 표정으로 하나 둘 흩어졌다.
세자는 이슬휘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이 공. 갑시다.”
세자는 앞장서서 휘적휘적 밖으로 나갔다.
문밖에는 도르곤이 보내 준 가마와 호위병들이 있었다. 하지만 세자는 가마를 탈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나는 걸어서 갈 터이니 가마는 그냥 두도록 하게.”
이슬휘는 세자의 옆에 서서 보조를 맞춰 걸었다. 도르곤이 보내 준 호위 병사들은 몇 보 뒤에서 그들을 따라왔다.
처음엔 숨소리도 거칠고 발걸음도 빠르던 세자가 점차 집에서 멀어질수록 평상심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이슬휘는 세자를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아팠다.
끝이 뻔히 보이는 일인데 뭘 저리 아등바등할까.
이슬휘가 세자의 앞날을 알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선의 상황을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세자의 이런 노력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금방 알 수 있을 터였다.
인조는 물론 권력을 쥐고 있는 서인 세력도 청을 철천지원수로 생각하고 있는데 청의 문물을 배우고 따라 하자는 세자의 말이 귀에 들릴 리가 없었다.
세자 또한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저리 열성적으로 청의 문물을 배우고자 하는 게 안타까움을 넘어 어찌 보면 미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슬휘는 기회가 되면 꼭 물어보고 싶었다. 도대체 세자의 본심은 무엇인지.
하지만 기회가 있으려나.

***

“세자 저하! 조선의 세자 저하가 아니십니까?”
제법 사람이 붐비는 거리에서 행색이 초라한 한 사내가 세자를 보고 달려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그렇소만, 그대는 뉘시오?”
세자는 잠시 흠칫 놀랐다가 다시 표정을 가다듬고 물었다.
“저는 지난 병자년의 난 때 청에 잡혀온 조선의 백성이옵니다.”
사내는 고개를 들며 반 울음을 섞어 말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세자 저하. 저 좀 데려가 주시옵소서. 고향에는 제 처와 자식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제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 채 힘들게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을 터입니다. 제발 저를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주시옵소서.”
세자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청의 복장을 한 한 남자가 달려와 들고 있던 몽둥이로 엎드려 있는 사내의 등짝을 후려쳤다.
“이놈이 일은 안 하고 무슨 수작이야!”
“억!”
사내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대로 바닥에 뻗어 버렸다.
“이게 무슨 짓인가?”
세자가 노해서 소리를 지르자 뒤에 있던 호위 병사들이 앞으로 왔다.
그 모습을 본 남자가 표정을 풀며 세자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나리. 이놈은 제 종놈이온데 나리를 귀찮게 해 드리는 것 같아 혼을 내 준 것뿐입니다요.”
그때 쓰러졌던 사내가 꿈틀거리며 일어나려고 애썼다.
세자는 호위 병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서 저 사람을 좀 일으켜 세우시오.”
사내는 병사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일어섰다.
세자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 사내를 보다가 주인 남자를 향해 말했다.
“이 사람을 나에게 넘기시오. 당신이 이 사람을 산 값보다 후하게 쳐줄 터인즉, 이들을 따라가서 값을 받고 이 사람을 풀어 주시오.”
세자는 고개를 돌려 또 호위 병사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빈궁에게 자초지정을 아뢰고 이 사람을 풀어 주도록 해 주시오.”
정신을 차린 남자는 연신 세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세자 저하.”
“나라가 힘이 없어 백성을 이리 고생시켰으니 내가 무슨 낯으로 그 인사를 받겠소? 이제 가서 조선으로 돌아갈 때까지 좀 쉬도록 하시오.”
“베풀어 주신 은혜 잊지 않겠사옵니다. 그리고 꼭 성군이 되시어 우리 불쌍한 백성들의 원수를 갚아 주시옵소서.”

***

세자는 그 남자와 만난 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말없이 한참을 걷던 세자가 이슬휘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공. 내가 서둘러 나오는 바람에 시간이 좀 남는 것 같지 않소? 이제 이 공과도 이별이니 저기 가서 이별주나 한잔하고 갑시다.”
세자가 저잣거리 귀퉁이에 있는 객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들은 객점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술과 안주가 왔다. 세자는 술을 한 잔 마셔 목을 축이고는 그에게 말했다.
“그대같이 나를 이해해 주고 도와줄 사람이 주변에 많으면 좋을 텐데 아쉽구려.”
“저도 세자 저하 곁에서 미력이나마 보태드리고 싶지만 제 상황이 여의치 않아 송구할 따름입니다.”
“그나저나 내가 어찌하면 좋겠소? 나라의 원수, 백성들의 원수를 갚는다는 게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시오?”
이슬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원수를 갚는다고 해서 꼭 당한 만큼 되갚아 준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옵니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그럴 수도 없지 않습니까? 일단은 우리가 두 번 다시 이런 일을 당하지 않게 힘을 기르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하옵니다.”
“내 말이 그 말이 아니오. 그런데 사람들이 그걸 이해하지 못하니…….”
술을 한 잔 들이켠 세자가 말을 이었다.
“나라고 청이 좋아서 이러겠소. 적을 알고 나를 알고, 냉정한 현실 기반 위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소.”
“백번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하오나 세자 저하…….”
이슬휘는 마음속에 있던 말을 꺼내 놓으려고 세자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하실 말씀이 있으시오?”
세자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저하께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조선에서는 주상 전하를 비롯해 권력을 잡고 있는 서인의 무리가 다 하나같이 청에 대한 원한과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사옵니까?”
“그래서요?”
“그런데 저하께서 그들에게 너무 청과 가까운 듯한 인상을 심어 주시면 장차 보위에 오르시더라도 큰 갈등이 있을 것 같아 걱정이 되옵니다.”
세자가 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나도 알고 있소. 아니, 더 나아가서 내가 이렇게 밉보여서는 아예 왕위에 오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고 있소. 하지만 이 길이 올바른 길임을 내가 알고 있고 내가 갈 수 있는 길이 이 길밖에 없음도 아는데, 내가 어찌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겠소?”
“하오나, 저하.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그 뜻을 조금 숨기시는 건 어떠신지요?”
세자는 말없이 이슬휘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술잔을 들어 훌쩍 비웠다. 그러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쩌면 나에게는 시간이 부족할 수도 있소…….”
이슬휘는 속이 뜨끔했다. 이슬휘는 얼른 표정을 바로잡고 물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곧 조선으로 돌아가겠지만 아바마마나 서인 중심의 중신들이 내 귀국을 반가워나 하겠소? 어쩌면 나는 조선에 돌아가서 험한 꼴을 당할지도 모른다오.”
아아, 세자는 자기가 당할 일을 짐작하고 있구나.
“그러니 더더욱 몸을 사리셔야지요.”
세자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말했잖소? 이 길이 옳은 길이고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그리고 난 내가 이 길을 갈 수 있어 행복하다오.”
“행복하시다니요? 뒤에 험한 꼴을 당하실지도 모른다면서 행복하시다니요?”
세자가 답답해서 이슬휘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이보시오, 이 공. 내 뒷날이 불행하다고 해서 지금도 불행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오? 오히려 내 나중이 불행할 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 더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게 아니겠소?”
이슬휘는 무엇으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더 많은 이야기가 이어졌고, 시간이 되어 세자와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러는 중에도 이슬휘의 머릿속에는 세자의 말만 계속 맴돌고 있었다.
이슬휘는 아담 샬의 거처 앞에서 작별을 했다.
이슬휘는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큰 길에서 넙죽 엎드려 세자에게 큰절을 했다.
그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기의 진심이었다.

***

이슬휘는 찻집의 그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세자의 말을 되씹어 봤다.
나중이 불행할 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 더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그것은 자기가 민자영과 소현 세자를 만난 이후로 고민하던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해 주는 말이었다.
비록 그들의 끝은 불행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끝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더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그들의 행복을 지켜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슬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커피 향을 음미했다.
이슬휘는 다시 창밖을 내다보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러다 뒤통수에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보니 한 여자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였다!
그녀는 막 고개를 돌려 문밖으로 나갔다. 슬휘는 그녀를 따라가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당탕탕.
그런데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뒤로 넘어지면서 의자 다리에 걸려 이슬휘도 같이 넘어지고 말았다. 종업원이 달려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죄송합니다.”
이슬휘는 고개 숙여 인사를 하며 쓰러진 의자를 바로 세우고는 냅다 문밖으로 달려 나갔다. 하지만 슬휘는 또 그녀를 놓치고 말았다.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다.
이슬휘는 다시 찻집으로 돌아와 종업원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아까 나간 그 여자 분, 여기 자주 오시는 손님인가요?”
종업원이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아, 그분. 자주 오시지는 않는데……. 오시면 항상 손님이 앉으시는 그 자리에 앉으셨어요.”
“그래요?”
아아, 그렇다면 내가 전에 눈 흘기며 봤던 그 여자가 그녀였던 건가.
“네. 오늘은 손님이 먼저 그 자리를 차지하고 계셔서 다른 자리에 앉으셨는데…….”
종업원이 말하다 말고 ‘쿡’ 하고 웃었다.
이슬휘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종업원이 웃음을 거두었다.
“아, 그분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요…….”
“뭐라고 했는데요?”
“아, 저……. ‘차 한 잔 시켜놓고 저리 오래 앉아 있으면 이 집 장사는 어쩌라고’라면서 중얼거리셨거든요.”
아니, 그건 내가 할 소린데……. 내가 뭘 그리 오래 있었다고…….
이슬휘는 다음 날부터 그 자리에 앉지 않았다. 이슬휘는 그녀에게 흔쾌히 그 자리를 양보하기로 했다. 대신 종업원에게 부탁해 그 자리 바로 옆에 또 하나의 1인용 탁자와 의자를 놓고 거기에 앉았다.
그리고 덫을 놓은 사냥꾼처럼 그녀가 와서 그 자리에 앉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나비의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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