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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게임]

Chapter 1.

빨간 머리 불청객

답답하다.

가슴이 조여 온다.

따스한 온기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공간 속에 나는 누워 있다.

이곳은 어디인가?

눈이 터질 듯이 쏟아지는 밝은 빛들과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형상만 어른거릴 뿐이다.

온몸이 꽁꽁 묶인 채 손가락만 꿈틀거린다.

내 몸 곳곳에 붙어 있는 수많은 전극들이 나를 자극한다. 링거를 통해 내 안으로 끊임없이 밀려 들어오는 알 수 없는 점액질들이 한없이 정신을 몽롱케 한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일까?

이미 이 공간에 들어오는 순간 시간은 멈춘 듯하다.

링거 바늘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끈적끈적한 기운은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파괴하는 듯한 엄청난 고통을 안겨 준다. 난 그 고통과 맞서 싸우다 기절해 버리고, 다시 깨어나기를 수도 없이 반복할 뿐이다. 그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사육인가?

닭장 속에 갇혀 있는 닭들처럼, 우리 속에 갇혀 있는 돼지처럼…….

도대체 내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 여기가 어디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끝없이 반복되는 고통으로 심장은 터지고 머리는 부서질 것만 같다. 이 고통의 끝은 대체 어디일까? 끊임없이 같은 생각만을 되뇌고 있다. 아마도 이대로 점점 미쳐 가나 보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

여기서 나가야 한다.

죽더라도 나는 여기서 나가야만 한다.

그것만이 이 고통을 끊어 버릴 유일한 길일 것이다.

“크아아아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빠져나간 링거 호스들이 대가리를 얻어맞은 뱀처럼 퍼덕거린다. 전신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이 솟구친다.

내 몸을 옭매고 있는 벨트들이 심하게 요동친다.

‘……30번 실험체. 심각한 발작 장애 상태에 돌입. 위기 상황 대처 프로그램에 따라 O. C(Overcome a crisis)1-4를 발동함.’

요란한 경보음과 함께 초록색 가스가 실내에 뿌려진다.

“허헉……!”

정신이 희미해진다. 매번 이런 식이다. 이 초록색 가스는 또다시 나를 무력하게 만들어 버린다.

힘이 빠진다.

정신을 붙잡으려 하지만 견디기 힘들 만큼 몽롱해진다.

또 이렇게 끝나 버리는 것인가?

이대로 다시 고통의 지옥을 겪어 내야 하는가?

순간 들려오는 폭발음. 그리고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큰 섬광에 정신이 번쩍 든다. 흐려지던 정신이 다시 돌아온다. 연이은 폭발음과 더불어 무력해진 온몸에 다시금 힘이 솟는다.

“크아아아아아아!”

다시 힘을 주고 몸을 일으킨다.

온몸을 옭매었던 벨트들이 모두 끊어져 나간다. 온몸에 붙어 있는 수많은 전극과 링거들을 거침없이 뜯어 버린다.

이제 끝인 건가?

“허헉!”

주위를 둘러보니 사방이 건초더미다. 어제 지친 몸을 이끌고 새벽이슬이라도 피할 겸해서 들어온 축사에서 정신을 놓고 잠들어 버렸었다. 깊은 밤에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허름한 건물이다. 더욱이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코를 찌르는 건초 썩는 냄새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런 곳에서 잠을 잤다니 무척 피곤했던 모양이다.

아직도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했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그 꿈의 의미를 모르겠다.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다. 대재앙이 휩쓸고 간 지구. 갈라진 땅들과 무너진 빌딩 속의 불길들. 모든 것들이 그렇게 부서지고 불타 없어졌다. 그 지옥 같은 시간 속에 온전한 기억을 가진 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가족과 소중한 모든 것들의 상실.

오히려 기억을 잃은 자들이 더 다행일지도 모른다.

문득 허기가 느껴졌다. 밥을 먹은 지가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당장 먹을 것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득 없는 폐허를 떠나려는 찰나 제법 굵직한 빗방울이 콧잔등을 때렸다. 점점 세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잠시 갈등에 빠져들었다. 비를 피할 것인지, 아니면 먹을 것을 찾을 것인지.

고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미 허기의 수준이 한계점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허기를 잠시나마 달래기 위해 입을 크게 벌리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았다. 그리고 잠시 후 발걸음을 옮겼다.

* * *

“휴우우.”

밤 11시, 노만 마을의 무기 수리 및 개조 전문점인 원샷(One Shot)을 운영하는 건스미스 예리엘 글라이스너는 이번 주 내내 별다른 일거리를 맡지 못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벌써 사흘째 내리는 비로 손님의 발걸음이 끊겨 버렸기 때문이다. 며칠 더 비가 내렸다가는 가뜩이나 어려운 가게 상황이 더 힘들어질 것 같아 걱정이 태산이다.

그녀가 하는 일은 총기의 개조와 수리가 전부였다. 보통 다른 마을의 건스미스는 대부분 총기를 파는 총포상을 같이 운영하기도 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원샷은 총기를 팔지 않았다. 마진이 높은 권총과 탄약류를 팔지 않다 보니 가게 운영은 근근이 유지만 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마을에서 유일한 건스미스이기에 의뢰나 주문이 곧잘 들어와 큰 걱정은 없었는데 우기(雨期) 막바지에 접어든 요즘은 예전 같지 못하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비가 많이 오면 총기를 비닐에 잘 싸서 습기를 피해 꽁꽁 숨겨 두기 때문일 것이다.

더 이상 찾아오는 손님도 없을 것 같아 예리엘은 일찌감치 문을 닫고 잠이나 잘까도 생각했지만 최근 한가한 탓에 오전 느지막이 일어나고 있어 침대에서 말똥거리는 눈으로 한참을 뒤척이기에는 너무 이른 감이 들었다. 문득 친한 언니 페이에게나 가 볼까 생각했지만 그녀가 때마침 오늘 멀리 여행을 떠났다는 것이 불현듯 떠올라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꼬르륵.

갑자기 배에서 신호를 보낸다. 저녁을 챙겨 먹은 지 불과 4시간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놈의 몸뚱어리는 참 뻔뻔하다.

예리엘은 가게 한편의 간이 주방에서 베이컨 몇 쪽과 계란프라이 그리고 바게트 빵에 스파게티까지, 테이블 가득히 음식을 차려 놓았다.

“후…… 요즘 같아서는 영 밥맛도 없네.”

시무룩한 예리엘은, 채 10분도 안 되어 접시를 깔끔히 비워 내고 빵 부스러기 하나 남기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예리엘은 행복한 얼굴로 가볍게 배까지 두들겼다.

“아, 잘 먹었다.”

초승달 눈을 하고서 행복하다는 듯 환히 웃는 예리엘. 저 매력적인 미소에 이끌려 가게를 찾는 단골손님도 적지 않았다. 예리엘과 대화할 수만 있다면 새로 산 M16-대재앙 이후 M16은 M14, AK47과 함께 가장 보편화된 총기. 특히 M16은 최근 가장 인기가 높은 총기인데 새로 판매되는 총에 방청유가 다른 총에 비해 엄청나게 많이 발려 나와 통칭 기름 총이라고 불림-에 기름칠을 하루에 몇 번을 해도 아깝지 않다는 단골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하지만 며칠째 내리는 얄궂은 비는 그런 단골의 발길마저 뚝 끊기게 만들었다.

포만감에 만족한 예리엘이 콧노래까지 부르려던 찰나 며칠째 작업 의뢰 표시가 비어 있는 칠판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는 또다시 우울해졌다.

“하아아…….”

예리엘은 한숨을 길게 쉬면서 무심코 빗줄기가 그치지 않는 창밖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때, 창밖으로 검은 그림자가 언뜻 스쳐 지나갔다.

‘……?!’

예리엘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꺄아아아아아!”

비명소리에 놀란 듯 검은 그림자는 소리 없이 사라졌다.

갑자기 무서워진 예리엘은 문 앞에 큼지막한 우산 하나를 집어 들었다. 건스미스임에도 불구하고 총 쏘는 데는 영 젬병이라 차라리 우산이 편한 그녀였다.

예리엘은 조심스레 창문을 열었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더니 원샷의 입구 저편에 누군가 쓰러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거센 빗줄기에 성별은 잘 구분이 안 갔지만 빨간 장발만이 두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예리엘은 고개를 쭉 빼고 이리저리 창밖을 살펴보았다. 더 이상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나 아까 창문에 비친 검은 그림자는 쓰러져 있는 저 빨간 머리가 분명했다.

예리엘은 우산을 무기 삼아 꼭 움켜쥐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섰다.

“저기요.”

그녀는 우산대로 기절한 빨간 머리의 옆구리를 천천히 찔렀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혹시 죽은 거 아닐까?

예리엘은 겁이 덜컥 났다. 그래도 한 번 더 찔러 봤다.

“저기요오.”

꿈틀.

쓰러진 사람이 살짝 몸을 떨었다.

“어? 저기요! 이봐요!”

“……파.”

쓰러진 그의 입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리엘이 귀를 가까이 갖다 댄다.

“네? 뭐라고요?”

“배……고……파.”

* * *

영락없는 여자인 줄 알았다.

갸름하니 곱상한 얼굴과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에 길게 늘어진 매혹적인 붉은색 머리카락까지, 생채기 가득한 얼굴이지만 마치 조각처럼 아름다웠다. 게다가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은 유난히 날씬한 허리를 강조한 여성용 레인코트로, 누가 보더라도 여자로 착각할 만했다. 나이는 이십 대 중반에서 후반? 이십 대 후반인 예리엘과 비슷한 또래로 보인다.

그는 지금 걸신이라도 들린 사람처럼 예리엘이 내온 음식을 거침없이 먹어 치우고 있었다. 벌써 빈 접시가 세 장이나 쌓여 있다.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이 사라질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기세다.

예리엘은 그런 그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처음 그를 발견했을 때 그는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지라 그녀의 부축으로 겨우 가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음식 냄새를 맡자마자 바로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다 죽어 가던 사람이 빈 접시가 쌓이면 쌓이는 만큼 활기가 넘쳐흘렀다. 여러모로 독특한 사람이다.

“이봐, 당신 말이야.”

왠지 삐딱한 예리엘의 말에 스파게티 접시에 머리를 박고 있던 빨간 머리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입안에는 아직도 음식이 가득하다.

“왜 우리 가게를 기웃거린 거야?”

예리엘이 마치 경비대가 우범자를 심문하듯이 빨간 머리에게 물었다.

우걱우걱, 꿀꺽!

“음…… 글쎄?”

“너, 남자는 맞는 거야?”

“아마도?”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빨간 머리는 먹는 데만 열중한다. 아무래도 식사가 끝나기 전까진 제대로 된 대화가 이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예리엘은 끈기 있게 기다렸다. 그의 멈추지 않는 식욕은 예상한 대로 모든 접시를 싹 비우고 나서야 끝이 났다.

“흐음…… 깨끗하게 비웠네?”

예리엘은 조금 놀랐다. 테이블에는 아까 자신이 사용한 접시 다섯 개와 이 남자의 접시가 더해져 9층 접시 탑을 이루고 있었다. 결코 만만치 않은 적수를 만났다.

“정말 맛있어.”

남자가 엄지를 치켜세운다. 모처럼 음식이 맛있다는 칭찬을 들은 예리엘은 흐뭇해졌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빨간 머리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했다.

“너, 마을 사람은 아니지?”

예리엘이 어느덧 이곳 노만 마을에 정착한 지 3년째. 그리 많지 않은 마을 사람들 속에서 이방인을 구분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

“그리고 그 몰골은 뭐야? 너 정체가 뭐야?”

“아…… 그게.”

“그게?”

빨간 머리는 무언가를 생각하려 곰곰이 애쓰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강성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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