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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아만전사 카르고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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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게임] 번쩍.
바로 앞에서 안광을 접한 파야곤이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났다. 전사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안광은 그 정도로 강렬했다. 파야곤이 본 것은 선명한 붉은 눈빛이었다. 통상적으로 회백색이나 연초록색인 아케니아 혈족의 눈동자와는 확연하게 다른 눈빛이었다.
마치 적응하려는 듯 빠른 속도로 눈을 깜빡이던 전사의 눈에 서서히 초점이 맺혔다. 붉게 빛나는 눈빛이 파야곤에게로 쏟아졌다.
“너는 누구지?”
착 가라앉은 음성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굵직한 음성에는 힘과 자신감이 역력히 배어 있었다. 파야곤이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아케니아 혈족의 마지막 전사를 뵙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머나먼 후손이 선조를 뵙습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전사는 심유한 눈빛으로 꿇어 엎드린 파야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내 이름은 카르고다.”
“네, 카르고 님. 우선 시장하실 텐데 요기라도 하십시오.”
카르고라고 이름을 밝힌 전사는 파야곤이 내민 마른 고기를 조금씩 뜯어먹었다. 가죽 주머니에 담아온 물도 마셨다. 그러던 사이 파야곤은 그동안 아케니아 혈족이 겪은 일들을 하나둘씩 들려주었다. 오래 전에 봉인되었다 깨어난 전사에게 해 줄 말은 많고도 많았다.
마른 고기를 가늘게 찢어 입에 넣으며 전사는 묵묵히 파야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로 아케니아 혈족이 얼음 거인의 노예 신세에서 풀려난 일과 발키온 연합이라는 유사종족 공동체의 일원이 된 일을 들어 나갔다.
“그렇게 해서 아케니아 혈족은 비아아우레움 가드 인근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현재 모든 아케니아 혈족이 그곳으로 이주한 상태입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카르고의 입가에 냉소가 맺혔다.
“또다시 다른 종족의 노예가 되었다는 말이로군.”
“그,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그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힘이 없는 상태에서 동등하게 대우받을 것 같나?”
파야곤을 쳐다보는 카르고의 눈빛은 냉혹했다.
“우린 아직까지 잊지 않았다. 얼음 거인에게 굴복하여 우리에게 무기를 들이댄 너희들의 작태를 말이다.”
“요, 용서를…….”
카르고는 꿇어 엎드리는 파야곤을 보지도 않고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산산이 부스러져 가루가 된 동료들의 잔해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우리들은 용감히 싸웠다. 그 지독한 얼음 거인들이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통로를 봉인해 버릴 정도로 말이다.”
“아, 알고 있습니다.”
“힘이 없다면 평화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아.”
그 말을 마친 카르고가 입을 닫았다. 파야곤이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우선 저와 함께 비아아우레움 가드로 가시지요. 그곳에 아케니아 혈족들의 새로운 거주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카르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은 아니다. 난 아직까지 힘을 되찾지 못했어. 과거의 몸 상태를 만들려면 한동안 수련에 몰두해야 한다. 그러려면 보는 눈이 없는 이곳이 가장 적절하지.”
“이, 이곳에 남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이곳에서 우선 몸을 만들고 그런 다음 외부로 나가서 발키온 연합의 실체를 한번 살펴볼 생각이다. 이대로 비아아우레움 가드로 가고 싶지는 않아.”
“하, 하지만…….”
파야곤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그는 앞으로의 계획을 모두 짜 놓은 상태였다.
눈앞의 카르고는 아케니아 혈족에게 마지막 남은 전사이다. 현재로서는 그의 혈통을 보존하는 일이 가장 시급했다. 때문에 그는 혈족 중에서 가임기의 여성 몇 명을 선발해 놓은 상태였다. 그녀들로 하여금 카르고와 결혼시켜 자식을 낳게 한다면 전사의 혈통을 이어 나갈 수 있다. 하지만 계획을 들은 카르고가 분노의 눈빛을 던졌다.
“나에게 종마의 역할을 하라는 말인가? 받아들일 수 없다.”
“죄, 죄송합니다.”
“너는 지금 즉시 새로운 거주지로 떠나도록 하라. 나는 이곳에서 나름대로 힘을 되찾은 뒤 추후에 비아아우레움 가드로 갈 것이다. 물론 발키온 연합을 구성하는 여러 종족에 대해 충분히 알아보고 나서 말이다.”
카르고의 뜻을 꺾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파야곤이 고개를 수그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수련하시는 동안 드실 식량과 물을 남겨 두고 가겠습니다.”
“내 걱정은 말도록. 아케니아의 전사는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인하니 말이다.”

카르고는 파야곤을 억지로 쫓아 보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수백 년 동안 얼음에 갇혀 있던 탓에 머릿속이 무척 혼란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얼음 거인들도 결국은 몰락해 버렸군.”
카르고는 조용히 봉인되기 전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아케니아 혈족은 아만족의 한 갈래이다. 대륙 전체에 퍼져 살던 아만족은 뛰어난 신체적 조건을 지니고 있고, 그 신체능력을 탐낸 얼음 거인들은 아만족을 대대적으로 붙잡아 노예로 삼았다. 병사, 일꾼 등등 아만족의 쓰임새는 무궁무진했다.
아케니아 혈족은 다른 아만족과 달리 외진 곳에 동떨어져 따로 생활을 영위하던 부족이었다. 험준한 얼음 산맥을 근거지로 살아가던 아케니아 혈족은 다른 아만족들이 얼음 거인들이 세운 신성제국의 노예로 힘겹게 살아가던 때에도 정복되지 않고 고유의 생활방식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얼음 산맥에 숨어 살던 아케니아 혈족이 대륙을 지배하던 얼음 거인의 눈에 띄는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다.
공교롭게도 아케니아 혈족의 정벌에 나선 자들은 얼음 거인들 중에서도 가장 잔인하고 무자비하기로 소문난 세피로스 일족이었다. 그들은 막대한 병력을 투입하여 아케니아 혈족을 정벌했다. 그리고 철저히 피와 죽음에 의한 철권통치로 아케니아 혈족을 다스렸다.
다른 얼음 거인들은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제시하며 아만족을 병사로 혹은 일꾼으로 만들었지만 세피로스 일족은 그렇지 않았다. 세피로스 일족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일꾼으로 부릴 노예뿐이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아케니아 혈족의 전투 계층을 말살시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카르고는 아케니아 혈족의 제사장을 수호하는 친위대에 소속되어 있던 전사였다. 압도적인 얼음 거인의 힘 앞에서도 일체 전의를 꺾지 않은 순수한 혈통의 전사.
최후의 순간에도 무기를 놓지 않았기 때문에 잔인하고 집요하기로 소문난 세피로스 일족의 얼음 거인들도 결국 그들을 직접 처리하지 못하고 얼음에 봉인하는 방법을 선택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해서 수백 년의 세월을 갇혀 있다가 다시금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카르고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했다.
“다른 혈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오랫동안 갇혀 있던 카르고가 그것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어쨌거나 다른 혈족들은 아직까지 전사의 혈통을 이어 나가고 있을 터였다. 오직 카르고 하나만 남은 아케니아 혈족과는 달리 말이다.
카르고가 별안간 눈빛을 빛내며 몸을 일으켰다.
“지금 시급한 것은 몸을 만드는 일이다. 전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싸울 수 있는 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지.”
카르고가 허리를 굽혀 파야곤이 남겨 둔 배낭을 집어 들었다. 살짝 들여다본 결과 몇 달은 버틸 수 있는 식량이 들어 있었다.
“물은 얼음을 녹이면 해결될 테고, 아무도 없다니 수련에는 최상의 조건이겠군.”
눈빛을 빛낸 카르고가 광산의 바깥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 * *

아케니아 혈족의 주거지는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모든 구성원들이 새로운 거주지로 이동한 탓에 느껴지는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경비병 레논이 지루한 눈빛으로 산등성이 위를 쳐다보았다.
“아케니아 혈족은 모두 철수한 것 같은데 굳이 이곳을 지킬 이유가 있나?”
그 말을 받은 것은 동료인 테일러였다. 레논과 테일러는 이인일조로 아케니아 혈족이 살던 분지의 관문을 관리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적막한 주거지를 쳐다본 테일러가 말을 받았다.
“물러갔던 얼음 거인들이 다시 돌아올 가능성도 있지. 어쨌거나 관문을 지키는 관리인이 필요하지 않겠어?”
“답답해서 하는 말이야. 아무런 할 일이 없으니 심심해 죽겠어.”
길게 하품을 하는 레온을 보며 테일러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필드에서 몬스터와 피 튀게 싸우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 일단 이곳에 있으면 다칠 일은 없으니 말이야.”
“무료하게 지내는 것보다 차라리 그게 낫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둘의 고개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돌아갔다. 관문 안쪽에서 묵직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저벅저벅.
그들은 반사적으로 허리에 찬 무기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아직까지 철수하지 않은 녀석이 있었나?”
“모르지. 어쩌면 척후로 나온 얼음 거인일지도…….”
두 초병의 이마에서 살짝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농담처럼 한 말이었지만 정말 척후로 나온 얼음 거인이라면 둘의 삶은 여기에서 끝난다. 강하기로 소문난 얼음 거인은 한낱 인간 병사 둘로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다.
그러나 어둠 사이에서 드러난 실루엣을 보자 그들은 쓴웃음을 지으며 무기를 늘어뜨렸다. 안개를 뚫고 다가오는 자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아만족이었다.
머리 위로 솟구쳐 오른 강인한 뿔에 가늘게 찢어진 눈, 단단한 턱 등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단숨에 공포에 사로잡히게 만들 정도의 외모를 지닌 아만족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조소가 어려 있었다. 무시무시한 외모와는 달리 아케니아 혈족은 겁이 많고 싸움을 싫어하는 온순한 종족이었기 때문이다. 힘이 좋기 때문에 주어진 일은 잘 해내는 종족, 이것이 그들의 눈에 비친 아케니아 혈족의 모습이다.
홀로 모습을 드러낸 아만족은 흔들림 없이 관문 쪽으로 걸어왔다. 레논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정지하라!”
그 말에 걸음을 멈춘 아만족이 고개를 들어 관문 위의 레논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의혹을 본 레논이 곧 자신의 실책을 알아차렸다.
“이런, 아직 통역 마법을 작동시키지 않았어.”
레논이 쓴웃음을 지으며 허리에 찬 수정구를 집어 들어 작동시켰다. 그 수정구에는 발키온 연합에서 쓰이는 공용어를 아케니아 혈족의 언어로 통역하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새로운 거주지로 향하는 아케니아 혈족인가?”
그 말을 들은 아만족이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의 모습을 면밀히 살핀 레논이 손짓을 했다. 그러자 테일러가 걸어가서 관문을 작동시켰다. 원래대로라면 건장한 병사 열 명이 달라붙어야 열 수 있는 관문이었지만 마법을 걸어 놓은 탓에 자연스럽게 열렸다.
쿠르르르릉.
아만족이 느릿하게 관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것을 본 두 경비병이 재빨리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느닷없이 나타난 아케니아 혈족의 존재는 무료하던 그들에게 흥밋거리가 생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름은?”
“카르고.”
레논이 조그마한 펜던트에 아만족이 말한 이름을 입력했다. 발키온 연합의 문장이 새겨진 펜던트는 도시에서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는 유일한 신분증이었다. 입력을 마친 레논이 펜던트를 카르고에게 건넸다.
“항상 가지고 다니도록 하시오. 그리고 가급적 빨리 연합의 공용어를 익혀야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을 것이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카르고를 보며 레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그들의 앞에 서 있는 아만족은 다른 아케니아 혈족과는 조금 달랐다. 지금껏 본 아케니아 혈족은 하나같이 지치고 겁먹은 표정이었지만 카르고라 이름을 밝힌 아만족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감과 함께 말로 표현하기 힘든 위압감이 당당한 덩치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런 녀석은 처음 보는군.’
특히 붉게 빛나는 카르고의 눈빛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억지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은 레논이 심호흡을 했다.
“수송마차는 더 이상 이곳으로 오지 않소. 그러니 거점 도시인 레나르까지 걸어서 가야 할 거요. 그곳으로 가면 한 달에 두 번씩 비아아우레움 가드로 향하는 수송마차가 있을 것이니 그것을 타시오. 그리고 세 번에 걸쳐 토벌을 했기 때문에 가는 길에 몬스터의 출현은 아마도 없을 것이지만 혹시 모르니 각별히 조심하시오. 길만 따라가면 어렵지 않게 레나르로 갈 수 있을 것이고, 걸어서 가면 보름 정도는 걸릴 테니 준비를 단단히 하시오.”
왠지 모르게 평소보다 말을 많이 한다고 생각한 레논이 레나르까지의 길이 그려진 지도를 내밀었다. 아만족이 솥뚜껑만 한 손을 내밀어 지도를 받아 들었다. 아만족의 차림새를 힐끔 살펴본 레논이 눈매를 좁혔다.
“무기가 아무것도 없구려. 하나쯤 준비해 가는 것이 안전할 것이오.”
그 말에 카르고의 얼굴에 흰 선이 그려졌다.
“무기 따윈 필요 없다.”
짧게 내뱉은 카르고가 몸을 돌렸다. 길을 따라 성큼성큼 걸어가는 카르고의 뒷모습을 레논이 묘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김정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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